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은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의 성장을 토대로 1987년 10월부터 민족민주세력의 구심을 형성하기 위한 전국민중운동연합 건설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88년 9월 2일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전민협) 추진위원회’가 발족했고, 12월 22일 제14차 회의에서 ‘전민협 결성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연)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노동자·농민 등 8개 부문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 ‘전민련’은 기층 민중운동의 참여가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단체와 차별성을 가졌다. 하지만 노선의 대립과 불일치, 전민련에 가입된 각 부문 및 지역단체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실했다는 등의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결성식에서 결성선언문 및 사업계획 발표를 통해 대북관계 및 5공 청산 등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민련’은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 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 미·노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정책 저지” 등의 과제를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아래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원흉처단투쟁’, ‘반민주악법개폐투쟁’, ‘조국통일 촉진투쟁’ 등을전개했다.
또한 8·18 영등포 을구 재선거에 참가했다. 그러나 영등포 을구 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했고, ‘합법정당 논쟁’을 거쳐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1989년 5월 전민련 상임집행위에서의 ‘정치세력화 소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다시 합법정당 결성추진이 본격적으로 제기 되었으며, “합법정당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조직 내 성원들은 그 직을 사임하고 추진한다”는 전민련 2차 중앙위의 결의에 따라 9월 28일 ‘전민련’ 간부 중 합당 추진인사들을 중심으로 1989년 11월 10일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의장단 및 주요 간부들이 구속·수배됨으로써 구심력이 약화되었고, 활동이 마비되었다. 이는 내부 원인과 맞물리면서 정치적 지도력과 투쟁력의 상실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