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말 정권의 유화조치로 노동운동이 일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1985년 4월 대우자동차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운동은 다시 탄압받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했던 구로지역은 주요 탄압대상이었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이 4월의 임금인상투쟁을 불법이라며 대우어패럴 위원장 등 노조간부 3인을 구속했다. 이에 6월 24일부터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항의 파업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동맹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구속자 전원석방, 노동운동탄압중지, 민주노동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 즉각 철폐, 노동부 장관 사퇴” 등을 요구했다.
6월 25일에는 구로공단의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노동자들이 작업시간 이후 지지농성투쟁을 벌였다. 6월 27일에는 삼성제약 조합원들이 점심식사 거부로, 그리고 청계피복노조는 6월 25일 구로공단에 지지선전물을 배포하고, 6월 26일의 가리봉 가두투쟁을 주도하면서 지지를 표명했다.
6월 26일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회원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지지농성을 하면서 ‘현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은 스스로의 말로를 재촉할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학생들도 전국학생총연합회 명의의 선전물 배포와 가리봉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농민운동단체들도 정권의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구로동맹파업의 성격은 시간이 갈수록 노조간부 구속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권을 규탄하는 투쟁으로 변화했다.
이후 6월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폭력단 500여 명이 들어와 파업을 강제해산시켰고, 청계피복노조 사무실과 다른 3곳에서 지지농성을 하던 민족민주운동세력도 해산되었다. 이어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도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이 날까지 5개 사업체에서 약 1,400여 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지지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또 구로동맹파업은 43명 구속,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해 해고 1,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최초의 노동자 정치투쟁인 구로동맹파업은 정권의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기업별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적 연대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구로동맹파업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 노동운동이 사회민주화를 위한 저항 주체로 성장하게 한 반독재민주화투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