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인간을 성에 따라 나눌 때 남성에 대응하는 여자를 이르는 사회학 용어이다. 여성 남성의 구별은 수렵 채취 사회에서 연령과 성별로 사회적 역할을 나눈 데서 비롯되었다. 농업이 발전하여 강한 체력을 가진 남성을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형성되면서 여성은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배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제도적으로 남녀 차별을 강화한 것은 주자학이 도입되면서였다. 근대기에 여성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광복과 더불어 교육 기회 확대, 정치 참여권 보장 등 여러 변화가 생겼다. 사회적, 법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여성에 관한 문제를 고찰할 때는 남성과 대비하여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리적, 해부학적 차이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성차(性差)는 단순히 생물학적 요인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성에 따른 상이한 경험세계, 즉 특정사회구조내의 차별적 메커니즘을 경험하면서 구조화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성별에 따른 행동유형 및 성격적 차이란 생물학적 결정요소와 사회문화적 요인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재생산의 기능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남녀가 서로 다르게 심리적 발달을 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핵심적인 사실은 흔히 여성 특유의 심리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실은 사회문화적으로 양성되고 길들여진다는 데 있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각 사회 나름의 성차이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여 각 성에 기대되는 성역할이 사회화와 교육을 통하여 차별적으로 세습된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회에서 소녀들은 가족과 같이 살면서도 오빠나 남동생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다른 규범 및 문화 속에서 키워지며, 다른 옷과 장난감이 주어지고 다른 놀이를 배우며 남자들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배운다. 부모의 성역할 및 성격상의 차이도 어린이가 성차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며, 어린이는 동일시(identification)를 통하여 성역할을 배우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남성성(masculinity)’ · ‘여성성(femininity)’이라는 규범적 내용이 사회구성의 원리로서 각 부분영역에 내면화되어 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단순히 성 차이뿐만 아니라 성역할 분화를 둘러싼 문화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각 사회에서는 나름대로의 성차에 대한 해석에 따라 남성 또는 여성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이가 사회문화적으로 남성의 우월성과 지배, 여성의 열등성과 종속을 의미하게 된다는 데 있다. 즉 ‘차이가 있다.’는 것이 단순히 ‘다름’을 의미한다면 문제삼을 이유가 없으나, 단순한 차이가 차별의 구실이 될 때에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차별은 규범적인 개념으로 가치판단을 동반하고 나아가 소외와 착취와 억압을 합리화시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극도로 남녀를 분리시켜온 전통 속에서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윤리규범이 사실상 ‘남녀차별’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통사회에서 남녀는 역할면에서 ‘밖’과 ‘안’, 정체성에 있어서 ‘공(公)’과 ‘사(私)’,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에서 따로 거주함으로써 실제생활에서 엄격히 구분되었고, 이러한 남녀구분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분업의 토대로서 강제적 역할분담 내지는 강제적 상호보완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은 이미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성이 누리는 여러가지 특권과 기회가 차단된 차별적 접근이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여성에게 강요된 내훈(內訓)의 덕목도 여성의 차별적 사회화에 기여하였다.
예를 들면 순종의 미덕과 현모양처 · 삼종지도(三從之道) · 칠거지악(七去之惡) ·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 수절(守節)의 윤리,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차별적 편견과 차별적 윤리는 이미 사회규범체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일탈하게 되면 비윤리적 · 비도덕적 여성으로 제재를 받게 되었고 결국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차별적 지위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남녀유별의 전통이 자유 ·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암암리에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여성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문제는 성별불평등의 문제로 귀결된다. 성별불평등이란 바로 이상의 요소들이 지배-종속이라는 불평등관계로 형성되어가는 사회구조적 계기와 과정, 또한 그것을 합법화하는 기제(機制)와 관련된 문제이며, 역사적으로는 가부장제의 형성과 그 전개과정에 연결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존재형태의 고찰은 전체 사회구조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시초는 수렵채취의 원시공동체에서 연령과 성별로 사회적 역할을 나눈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연물 채취로 생활을 영위하던 씨족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든 사회구성원이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제도적으로 남녀차별을 강화하는 불평등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은 임신 · 출산 · 육아의 신비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어 풍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의 집행자로 그 사회의 존경을 받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원시종교상의 신이나 고대민족종교상의 최고신이던 산신이나 호국신은 거의 모두 여성이었는데, 특히 대지를 풍요롭게 하는 지모신(地母神)이었다. 신라의 제2대 남해차차웅도 그의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를 주제(主祭)하게 하였다.
인류문명사상 획기적인 혁명이 되는 농경 · 목축의 생산 및 관리방법의 도입은 아마도 채집에 종사하던 여성에 의하여 시작되었을 것이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생활혁명으로서 토기제작과 직포기술의 등장도 주로 여성의 공적이라고 추정된다. 신라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이 왕의 순시 때 수행하며 농상(農桑)을 독려하였고, 박혁거세와 더불어 이성(二聖)으로 백성의 추앙을 받은 것도 왕비로서의 위치뿐 아니라 농사 · 직포 등 생활을 주관하는 업무가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미루어보더라도 남녀간에 지위의 우열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비교적 평등하고 호혜적인 분업관계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였으리라 본다.
그러나 서기전 7세기경에 들어온 제1차 청동기문화에 이어 제2차 청동문화와 철기문화가 도래하면서 종래의 여성지위에 커다란 변화를 보게 되었다. 금속문화의 등장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되고 농업이 점차 발전하여 배수 · 관개시설과 토지의 개척 · 경작 등 강한 체력을 가진 남자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여성은 농업생산의 주역으로부터 배제되기 시작하였고, 씨족사회 내부에서도 계급이 발생하여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종래의 씨족사회단계에서 부족사회단계로, 이어 부족연맹단계로 발전하면서 모든 씨족원은 씨족사회의 생산협력자로부터 개별가족 또는 가족군으로 분화 내지는 계층적 질서를 형성하여 갔는데, 그 과정에서 서서히 가부장권이 확립되어 여성의 예속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의 역임(役任)은 씨족사회의 일원으로부터 가족단위의 일원으로 옮겨 갔으며, 주로 남자에 의한 권력구조의 형성과 정복 전쟁이 계속되는 부족사회 이후로 여성은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면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범위는 더욱 좁아지고, 남성 즉, 권력에의 예속은 더욱 강해졌다. 따라서 권력구조의 형성이 빠른 사회에서는 여성의 남성에의 예속은 그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일찍이 부족국가로 발전하여 중국과의 왕래가 잦았던 고조선에서는 “부인이 정신(貞信)하여 음벽(淫癖)이 없었다.”고 한 것과 부여에서 “투기한 여인을 사형하여 폭시(暴屍)하였다.”고 한 것, 또 백제에서 “간음녀(姦淫女)를 부가(夫家)에 몰입하여 비(婢)로 삼았다.”고 한 중국측 기록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중천왕이 투기하는 관나부인(貫那夫人)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들은 모두가 여성의 남성에 대한 강한 예속을 암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고구려의 예서혼(豫壻婚)이나 옥저의 예부혼제(豫婦婚制)는 가족을 모계로 하는 씨족사회의 유풍이 고대농경사회의 남자노동력 공여(供與:제공하여 줌)와 조화를 잘 이룬 제도로서, 일반 평민남자는 재산공여 대신에 상당한 노동력을 처가측에 지불하지 않고서는 혼취(婚娶)의 성립이 어려웠던 것이다. 노동력공여를 통한 혼취의 성립은 남자의 경제력의 우위성을 초래하고, 부인을 곧 재산의 일부로 간주하게 한다. 그러므로 부를 소유한 권력자는 능력껏 처를 소유하게 되고, 처의 수는 곧 권력과 부의 척도가 된다. 따라서 처 · 첩의 투기는 권력(남자)에 대한 도전이며 대가족제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므로 이를 엄히 다스렸다. 가부장적 가족의 형성은 대체로 부족국가가 성립되면서 특히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가운데 가부장권의 형성이 가장 늦었던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중기까지 지배계층의 모계 경향이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신문왕 이후 유교정치 이념이 크게 표방되면서 가부장권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기층사회에서는 이와는 달리 신라말 고려초까지도 가계계승에 있어서 모계적 경향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가부장권이 전체 사회적인 수준에서 체계화된 것은 오복제도(五服制度)가 확립된 고려 성종대를 전후한 시기로 추측된다. 제도적으로 남녀차별을 강화하고 남녀관계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경직화된 것은 주자학이 도입되던 고려말 조선초부터였다.
물론 고대부족사회나 고대국가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양성차별의 가치나 규범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인정되었고,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 즉 남녀가 혼인을 하면 남자는 여자의 집가까운 곳에 따로 지은 서옥에서 살며, 아들을 낳아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오랜 기간 처가에서 살아야 하는 제도라든지, 신라 화랑도의 기원이 되는 원화(源花)가 여자였고 신라 역사상 3명의 여왕이 있었으며, 신라 품계제도에서도 모계가 부계 못지 않은 지위를 인정받은 사실 등이 있다. 또한 고려에서도 부녀자들이 자유로이 사찰에 출입하는 등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이전 시대의 사회적 부조리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한 방편으로 여성의 방종한 행동을 규제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경국대전』과 같은 규범체계 속에 반영되었다. 새 왕조는 새로운 윤리목표를 부모에 대한 효순(孝順)과 ‘신불사이군(臣不事二君:신하가 절개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과 더불어 ‘여불경이부(女不更二夫)’에 두고, 여성의 외출을 억제하여 사회 특히 남자와 격리시킴으로써 차별적 성문화(性文化)를 이루어갔다.
특히 ‘불경이부’의 윤리권은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1386년(우왕 12)에 이미 6품 이상의 처첩은 부(夫)의 사후 3년간 재가할 수 없고 수절할 경우에만 포상하게 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양반의 정처(正妻)로 삼가(三嫁) 및 실절(失節)한 부녀의 자손은 문과나 소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양반부인의 남편에 대한 수절을 강요하고,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새 윤리권의 확립을 보았다. 이러한 가운데 내외법(內外法)이니 남녀칠세부동석이니 하는 규범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또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 · ‘삼종지도’ · ‘칠거지악’과 같은 규범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요구를 정당화하는 데 적절한 규범체계였다. 이러한 유교적 규범체계는 대체로 사대부 양반지배층의 가문에서 비교적 엄격히 시행되었고, 상민이나 천민층에서는 편의에 따라 일부 그 규범을 모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탈하는 자유로운 행위 유형을 드러냈다.
한편, 조선왕조는 사회기층의 전위(全委)를 ‘가(家)’에 두었기 때문에 ‘가’의 유지를 위하여 『경국대전』에서는 부가장(父家長)의 절대권을 법으로 인정하였고, 처 · 첩 · 자손은 부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의 구성원으로 부가장의 예하에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모든 부문에 걸쳐 불평등하게 규정되지는 않았던 흔적도 있다. 즉, 공식적 규범에서는 여성이 처(妻)에서 모(母)로 승격될 때에 부(父)와 거의 동등한 가장의 권리가 주어진다든지, 여성에 대한 균등상속의 보장규정이 있었다든지, 아내의 재산은 죽은 뒤 친정으로 귀속되는 원칙, 또 주부로서의 여성은 집안에서 가문의 기둥으로서 상당한 결정권 즉, 총부권을 누리기도 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사실과 법규규정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전형적인 지배층 유형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였다.
① 가계상속권과 재산상속권상의 지위:고대사회 때 왕권의 부자상속이 강화된 것은, 고구려는 고국천왕에서 미천왕에 이르는 시기이고, 백제는 근초고왕에서 동성왕대를 전후하여 확립되었다. 그 뒤에 가계계승에 있어서 남계적자계승(男系嫡子繼承)이 위주가 되고, 적자가 없을 경우에는 서자에게로 그 계승권이 인정되었으며 여자계승은 없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골품제도상의 엄격한 제약으로 인하여 중기까지 가계계승에서 부계와 모계를 똑같이 중시하였으며, 서자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여자나 사위에게 가계를 계승시켰다. 이차돈(異次頓)이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모계의 성(姓)을 계승한 것이라든지, 경주호장(慶州戶長)을 지낸 거천(巨川)이 모는 아지녀(阿之女), 조모는 명주녀(明珠女)라고 가계를 밝힌 것이 이를 말해준다. 신라에서 부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태종무열왕부터이며, 서자계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적자계승을 위해서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에 대한 일방적인 이혼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오면 왕위계승이 서자에게까지도 주어지고 있어 골품제 보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모계의 중요성이 점차 퇴색되어갔다.
고려시대의 가계상속은 적자입사(嫡子立嗣)를 원칙으로 하나, 적자 유고시에는 적손(嫡孫)으로 하고, 적손이 없을 경우에는 동모제(同母弟)를 세우고, 동모제가 없을 경우 서손을 세우며, 남손이 없을 경우는 여손을 세우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여손계승권이 가장 마지막에 인정되고 있는데, 이는 신라 이래의 여자상속이 어느 정도 존속되고 있는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손이 직접 상속자가 되기보다 황보 영(皇甫頴)이 외손 김녹숭(金祿崇)을 후사로 삼은 것처럼 외손자가 잇고 있다. 이처럼 재산상속에 있어서 노비 등 일반 재산상속 분배에 딸이 출가여부에 관계없이 참여하고 있으나, 공음전 상속은 딸 대신 사위로 규정하고 있다.
가계와 재산상속에서 점하는 비교적 안정된 여성의 지위는 유교이념으로 여성을 남성에게 강하게 예속시켰던 조선시대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과전(科田)은 본인 사망 후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으로서 그 부인과 자녀들에게 물려줬다. 특히, 부모의 노비를 자녀들이 분배받을 경우에는 승중자(承重子:할아버지나 아버지 대신 제사를 받드는 자식)만이 5분의 1을 더 받고, 중자녀(衆子女)는 균분하며, 양첩 · 첩자녀에게는 7분의 1과 10분의 1을 지급하게 되어 있다. 이때 중자녀에 대한 균분은 출가여부에 관계없이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이(李珥) 7남매의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승중자를 제외한 기타 중자녀의 경우 대개 균분에 기초를 두고 분재하고 있는데, 그 중 장녀의 상속액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과거(寡居:과부로 지냄)하는 삼녀(三女)에게 보다 많이 할애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녀 균분의 분재제(分財制)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없어져가고, 주로 승중자만이 재산을 상속받는 경향이 늘어났다.
②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지위:고대국가로 발전하는 시기에 지배자는 타부족국과의 연합을 통하여 그 지배권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왕비족이라고 하는 일정한 통혼족과 혼맥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지배자의 아내는 족적 배경을 가지는 존재로서, 지배자의 협력자 내지 옹호자로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산상왕은 왕비족인 절노부 출신의 우왕후(于王后)의 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족적 배경을 가지지 못한 측실(側室)의 지위는 정비(正妃)의 지위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천왕이 총애하는 관나부인과 정비 사이의 질투싸움에서 관나부인이 희생된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왕위와 가계계승의 부자상속이 확립되면서 아내의 지위는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과정에서 통혼족의 의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며, 이제 아내는 종래의 통혼족의 배경보다는 한 국가, 한 가족을 이어갈 아들을 낳음으로써만 아내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가부장의 권위가 합법적으로 비대해져가면서 어머니의 신분이나 위치는 자녀의 신분결정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녀, 서계(庶系) 가족은 적계(嫡系) 가족의 부속적인 지위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처(嫡妻) · 서처(庶妻)의 엄격한 구분은 적처의 족적 배경이 부족시대처럼 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동일신분 안에서 맺어지는 혼인의 경우 적처의 족적 배경이 남편에게 주는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최고지배자인 국왕 이외의 귀족 이하 평민들은 대체로 일부일처제를 대행하였다. 일부일처제와 적처의 지위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가(家)’의 유지를 기본적인 통치 골간으로 하는 조선왕조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가부장권이 확립된 가족질서 안에서 부(父)는 ‘칠거지악’이나 ‘삼종지도’ 등의 유교적 윤리를 빙자하여 가장의 권한을 무한정으로 남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가부장의 권한으로 아내가 희생되는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강지처불기(糟糠之妻不棄)’의 유교적 신의와 이혼의 원칙적인 불인정으로 적처에 대한 가부장의 권한남용을 최소한 억제하고 있었다. 가장의 절대권이 주어진 가족제도 아래 적처의 지위가 이러한 정도의 사회적 보장을 받게 된 것은, 신분제적 사회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특권신분계층의 혈통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안정적인 가정의 재생산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누구의 딸이라는 신분에 따라 누구의 아내가 되었던 것뿐이며, 공식적인 사회제도와 문화를 창조하는 장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반면 여성이 아내로서 한 가정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책임은 막중하였다. 시부모 모시기, 자녀의 출산 · 양육과 교육, 시가 형제와 친족에 대한 화목한 사귐, 비첩에 대한 관대한 거느림, 제사 받들기 등이 오로지 아내의 손에 달려 있었으며, 또한 밤낮으로 여공(女工 · 길쌈 등)에 힘써야 하였다. 특히 사대부의 아내인 경우, 남편이 출세하기까지 여공으로 한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일이 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아내가 어머니의 지위로 발전해갈 때, 특히 부(父)가 없을 때의 모(母)에게는 부와 거의 동등한 준가장(準家長)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며, 아울러 가장의 범위는 부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모에게로 확대되어 간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모는 여성이라는 고유성격보다는 항시 가계를 잇는 아들의 어머니라는 매개적 성격에서 가부장제의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③ 혼인제도상의 지위:중국측 기록에 의한 부족국가단계의 사회, 또는 『삼국사기』 · 『삼국유사』에는 고대사회의 자유혼의 모습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족국가 성립 이후 신분계층이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배계층에서 신분의 제약으로 인하여 남녀의 혼인은 이미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부모에 의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혼례절차도 예서혼과 같은 전통적 혼속이 지배계층사회에서는 사라져가고 오직 평민사회에서만 존속되고 있었다. 지배층에서는 납채(納采:남자 집에서 여자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일) · 납징(納徵:신랑집에서 보내는 예물) · 친영(親迎:신랑이 신부를 맞아 데려오는 육례의 마지막 예식) 등의 중국식 혼속으로 치러졌다. 이러한 중국식 혼속이 평민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것은 역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였다.
한편 고대 이래 신분구성상 여가(女家)가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여가의 의미는 가부장제가 가장 발달되었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계중심사회의 유제(遺制)라 할 수 있는 남귀여가제(男歸女家制)가 그대로 행하여지고 있었는데, 주자학적 명분론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문공가례』의 원칙론을 주장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친영의 예를 행하지 않고 남귀여가의 법을 행하므로, 부인이 친정부모의 사랑을 믿고 남편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과 투기하는 마음은 날로 자라 가도(家道)가 무너진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남귀여가제는 남자의 권리와 위신을 약화시켜 주자학적 윤리에 어긋난다고 하며 친영례를 준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친영례는 조선 중기까지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후반기 이후 점차 반친영례(半親迎禮) 정도가 행하여져 이익(李瀷) 등 실학자들도 왕족간에는 친영례가 행하여지고 있으나 사대부간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고대국가 성립 이후 여성은 사회 경제의 주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단순히 가족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하였고, 남편의 지위에 따라 작봉되어 국가의 경축행사 이외의 사회참여는 허락되지 않았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정치와 교육 등은 지배계층인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자에게는 부덕을 함양하는 『여사서(女四書)』 · 『삼강행실도』 · 『열녀전』 · 『소학』 · 『내훈(內訓)』 등이 교육되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이러한 교양에 접할 수 있는 계층은 여성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하층여성들은 글자를 깨우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남존여비사상의 절대적인 영향으로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가사를 충실히 돌보며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 강조되었다. 따라서 여성교육의 기본은 남성지배하에서 가사노동과 길쌈 · 바느질 등의 습득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허난설헌(許蘭雪軒) · 신사임당(申師任堂) · 임윤지당(任允摯堂) · 강정일당(姜靜一堂) · 이사주당(李師朱堂) · 이빙허각(李憑虛閣) 등 일부 양반계급의 여성은 남성 못지 않은 교육을 받아 높은 교양을 지닌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 · 사상의 근저는 유교적인 남성중심 문화의 차별적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당시 사회의 각종 모순과 전통체제하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처지에 대한 불만이나 고뇌를 표현하는 여류작품과 글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17 · 18세기 이후의 실학자들 사이에서는 과부재가금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민여성들은 전통사회의 경제구조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통경제의 중심이 되는 곡물과 포(布)는 모두 평민에 의하여 생산되는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포는 오직 여성의 손으로 생산되는 것이었다.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에 따른 국역(國役)의 포납화(布納化)과정에서 포의 수요가 더욱 늘어남으로써 농가의 부녀들은 밤낮으로 베틀과 씨름하여야 하였다.
당시 농민들의 국역부담은 매우 과중하여 농민층의 가장은 아내와 가족의 협조 없이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특히 국역을 위하여 가장이 오랫동안 집을 비울 경우 가정경리는 오로지 아내의 손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층에서의 시어머니는 노동력으로 들어온 며느리를 심하게 부릴 수밖에 없었으며 자기 소생의 딸은 농민이 겪는 이런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도록 시누이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하거나, 또는 양반에게 첩으로 보냄으로써 인고의 지위를 면하게 하려고까지 하였다.
전통사회에서의 여성들은 자신의 지위를 회의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지위는 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존재양식으로서, 그들은 그밖의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한 귀족주의적 배타성으로 인하여 같은 여성이지만 신분적 · 계급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통일적인 인식을 같이할 수는 결코 없었다. 따라서 여성이 남녀차별과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위를 상대화할 수 있는 다른 세계관과의 접촉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는 여성들의 의식변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천주 앞에서의 인간 평등’이라는 사상은 신분을 초월한 각계 각층 부녀자들 사이에 전도와 신앙을 통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고, 선교를 위한 옥외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여신도들의 활동은 유교적 윤리질서의 파괴 · 도전으로 간주되어 이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었다. 당시 덕산(德山)의 양반인 홍지영(洪志榮)의 부인 강완숙(姜完淑)처럼 신앙 때문에 남편과 가정을 버리고 처형된 경우도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교이념체제에 대한 도전은 점차 증가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해방 의식이 싹텄다.
또한 민중중심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룩하고자 한 동학(東學)의 인간존중사상을 통해서도 여성의식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학에서는 도(道)의 근본을 ‘가도화순(家道和順)’에 두고 집안에서 부녀자에 대한 인간적 대우와 인격적 존중을 교리로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남녀권을 부정하고 ‘한울님’ 안에서의 인간 평등을 부르짖어 여성도 수도하면 사회의 지도자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여성관이 나타나면서 남녀차별 및 여성부자유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 20세기초의 「여자탄식가」에 이러한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여성은 남성의 자유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근대적인 남녀평등사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뿌리 깊은 남성의 가부장 권위에 도전하여 그 벽을 깰만한 논리적 근거나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사실상 새로운 사상 자체 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천주교 교리 속에도 가부장권의 권위는 살아 있으며, 동학의 부부화순의 여성존중론 역시 가부장의 권위는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시혜와 양보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는 그뒤에도 한참동안 극복되지 못하고 기초적인 형태로 작용한다.
한편, 1876년(고종 13) 개항과 더불어 근대적 개화의식이 고취되면서 박영효(朴泳孝) · 유길준(兪吉濬) · 서재필(徐載弼)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사상가들은 개화자강의 일환으로 여성의 개화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학대금지, 낙태를 위한 음독의 금지, 남녀에 대한 교육기회의 균등시행, 과부재가의 허용, 남자의 축첩 금지 등을 제시하면서, 특히 남녀 · 부부의 균등한 권리를 역설하였다. 이들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으로 1894년 갑오개혁은 남녀평등, 과부의 재가허용, 여성교육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또 1895년 7월에 반포된 「소학교령(小學校令)」에서는 ‘심상(尋常) · 고등(高等) 이과(二科)로 편제(編制)하여 남녀를 모두 취학하게 한다.’고 규정하여 남녀교육의 기회균등을 법으로 인정하였다. 여성의 근대화과정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직접적인 공헌을 한 것은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와 그들에 의하여 운영된 『독립신문』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과 자주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주적 개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하면서, 개화의 기초는 오직 국민교육에 있으며, 국민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는 2세 국민의 교육을 담당하여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있으므로 여자교육만 잘 시행하면 개화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의한 초기 여성교육론은 여성이 ‘남성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총명한 2세’를 얻기 위한 여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그 주된 목적이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근대의식형성에 있다기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데 초점이 두어졌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구국(救國)의 문제의식 속에 1886년 기독교의 선교전략상 설립된 이화학당을 비롯한 여성교육기관은 1910년까지 무려 200개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여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1898년을 기점으로 여성들에 의한 자율적인 근대여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8년 9월 서울 북촌부인들이 발표한 「여학교 설시통문」, 즉 「여권통문(女權通文)」은 근대여권운동의 3대요소인 ‘참정권’ · ‘직업권’ · ‘교육권’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근대여권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이들은 관립여학교 설립을 목표로 찬양회(贊襄會)를 조직하고 회원들은 「여권통문」에 나타난 문제의식을 가지고 1898년에 한창 전개되던 독립협회 중심의 민권투쟁운동인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으며, 또 1899년에 민간인에 의하여 최초로 설립된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개교하였다. 이는 거의 남성에게만 독점된 지식과 직업에 여성도 동등하게 참여하여 여성의 정치 · 사회활동을 보장 받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여성해방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5년 이후에 접어들면서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개화 · 계몽주의자들에 의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이 도시뿐 아니라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녀의 교육계몽도 실력양성운동에서 최우선적인 과제였기 때문에 곳곳에 여학교가 설립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한 각종 부인회 · 학회들이 조직돼 활동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06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단체인 ‘여성교육회’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설립되었다. 여성교육회는 양규의숙(養閨義塾)을 세웠으며,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에 의한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진명부인회 · 대한여자흥학회 · 부인학회 · 양정여자교육회 · 여자교육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1905∼1910년간의 계몽적 여성운동은 1898년 찬양회운동에 나타난 여성해방 의식과 비교하면 지나칠 정도로 남녀간의 협조와 조화관계를 가진다. 즉, 이 시기의 여성운동의 목적은 대체로 가정 · 사회 · 국가에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람을 채움)할 수 있는 생활교육을 받은 보다 세련된 현모양처교육으로 한정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때의 여성운동이 ① 남성에 의하여 계도되어 그들이 제시한 교육안이 그대로 수행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② 1905∼1910년간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식민지화 정책에서 순종적 식민지 여성상이 강조된 때문이었다.
이 기간의 여성운동에는 이와 같은 한계성이 있었으나, 여성교육이 구국의 기초라는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여성 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 활동하게 하는 저력을 축적시켜준 데 그 의의가 매우 높다 하겠다.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참여 목적은, 첫째 왜채(倭債)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고, 둘째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三和港佩物廢止婦人會)의 취지에 나타나 있듯이 교육과 식산(殖産) 진흥에 있었다. 즉, 3,000만 부녀로부터 3,000만원을 거두어 1,000만원으로는 국채를 보상하고, 1,000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하고, 1,000만원으로는 은행을 설립하여 산업을 진흥하겠다는 것이었다. 셋째, 정치적 문제해결의 여성참여와 공적을 통하여 남녀동등권을 찾는 데 있었다. 그러나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였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일제는 교육 · 언론 · 학회활동을 통한 항일구국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7년에 「사립학교령」 · 「학회령」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일제의 여성정책은 한국인 2세에 대한 이른바 인적자원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1908∼1910년 사이에는 한일부인회 · 자선부인회 · 동양애국부인회 등 일제침략의 앞잡이였던 친일적 부인회만이 존재, 성장할 수 있었고,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활동은 존립할 수 없었다. 부녀자가 정치를 논함은 부덕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여성에게 정치적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에 의하여 탄압된 이후 3 · 1운동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의 부녀활동은 자의식을 완전히 빼앗긴 타의에 의한 활동이었다.
일제는 이미 통감부 통치하에서부터 여성에게 식민지교육정책인 저급한 실업교육만을 시켜나갔다. 1907년 친일 현관부인(顯官夫人)들로 조직된 대한부인회에서 양잠강습소를 설치하여 여성에게 양잠교육을 보급시킴으로써 한국여성을 일본의 견직물 원료생산자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식민지화 실업교육이 1910년 이후 총독부 통치하에서는 더욱 확대되어, 양가부녀의 유휴노동력을 최대한 동원시켜 막대한 누에고치 증산정책을 성취하였다. 또, 전통적으로 수전(水田)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양가부녀를 논으로 끌어내어 농업생산 증대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는 부녀저금회(婦女貯金會) · 권농협회(勸農協會) 등을 조직하여 식민지의 자본동원을 위한 저금을 강요하고, 부녀의 내직(內職)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편직(編織), 어망(魚網)제조 등을 지도, 장려하였다.
이러한 직업기술훈련은 모두가 일본자본주의를 팽창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렇게 훈련된 부녀들은 한달에 35∼55전(錢)의 싼 임금으로 일본내의 각 공장에서 노역착취를 당하였다. 1917년 1∼6월 사이에 일본 각 공장으로 간 여공수는 2,370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실업보도와 값싼 노임은 부녀의 경제적 독립을 도와주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값싼 노임에 얽매어 전통적인 부녀업무인 가정경리조차 어렵게 하였다. 또한,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에서는 여성의 호주상속이나 재산상속을 인정하지 않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보장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교육도 ‘지리 · 역사 · 산술 · 화학 · 체조 등의 고도교육을 하기에 앞서, 먼저 정숙한 고사(古事)와 유문(幽聞)을 좋은 본보기로 가르쳐 순종의 교육을 행하여야 한다’고 하여, 일제 식민통치하의 여성운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조직적인 여성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게다가 1907년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 애국계몽운동기의 교육대중화 과정에서 비로소 확대, 보급되던 여성교육이 일제의 민족교육 탄압정책으로 더 큰 타격을 입고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강점기의 여성교육은 종교계 여학교가 주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아울러 종교계 여학교가 근대지식여성층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운동의 지도층은 1898년 찬양회운동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 중심지도층을 이루었던 양반지식부인층으로부터 점차 기독교 교육을 받은 근대지식여성층으로 옮겨져, 1910∼1920년대 여성운동의 지도적 위치는 주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지식여성들이 중심이 되었다.
1919년 3 · 1운동 이전에는 이들 신교육여성들이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학교나 교회를 통하여 소규모의 정신적 저항을 전개하는 데 불과하였으나, 3 · 1운동을 계기로 민족적 의식과 인간적 자각에 기초한 항일여성단체가 조직되었다. 1913년부터 비밀결사대로 활동이 개시된 송죽회(松竹會)를 비롯, 3 · 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대한애국부인회 등 각종 비밀단체들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3 · 1운동을 전후한 여성의 구국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20∼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여성운동은 여성교육운동과 새로 형성된 여성근로자의 노동운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된다. 3 · 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교육과 산업의 실력양성운동이 다시 일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여자교육회와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에서는 사설강습소와 야학을 열어 여성교육에 주력하였고, 1923년의 조선물산장려운동에서는 부인들이 토산애용부인회를 만들어 약간의 효과를 거두었으나, 대체로 여성운동은 미진한 단계에서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는 일본자본가의 착취에 항거하는 직공들의 파업이 계속되었다. 연초공장 · 정미소 · 양말공장 · 메리야스공장 등의 여공들도 그들의 부당한 대우와 착취에 맞서 파업을 하였으나, 대체로 교육 정도가 낮은 이들 여공의 파업을 옹호하고 대변해줄 만한 여성단체가 없었다.
그러나 1924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운동이 침투되면서,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자동우회(朝鮮女子同友會)가 조직되어 여성운동의 정신을 선전, 계몽하고 언론기관을 통하여 사회여론을 환기시키는데 노력하였다. 1927년 이후 민족항쟁에 있어 좌 · 우 합작 움직임 속에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1927년 5월 통일 여성운동을 표방한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근우회의 행동강령은 ① 여성에 대한 사회적 · 법률적 일체 차별폐지, ②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③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 ④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의 폐지, ⑤ 농촌부녀의 경제적 이익 옹호, ⑥ 부인노동의 임금차별철폐 및 산전 · 산후 임금지불, ⑦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 등이다. 근우회는 봉건적 남녀질서의 철폐와 더불어 여성노동자의 처우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1931년 해체되고 말았는데, 이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념이 다른 연합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었다.
이처럼 꾸준히 지속되어온 여성운동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 권위주의적 구조와 가치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문화를 강조하였으므로, 여성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전통사회는 무너지고 있었고 소수 지식인층 여성들의 여권운동과 여성해방의식은 여성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의 지위향상과 해방은 아직은 대중화되기 어려웠고 이념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는 광범한 근대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변화도 포함된다. 특히, 미국에서 들어온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는 여성의 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정치참여의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여성의 성적 행위를 규제하던 윤리관에도 변화가 왔다. 또한 자유연애에 의한 배우자 선택이 새로운 가치규범으로 나타났으며, 유교적 남존여비의 종속적 관계에서 탈피하려는 규범과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뒤 6 · 25전쟁을 계기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활발해졌고, 사회단체활동도 증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격적인 여성의 경제활동참여는 1960년대 이후 공업화를 통한 경제성장과정에서 두드러졌다. 공업화는 도시화를 수반하고 통신매체기술의 혁신으로 서양전래의 대중문화가 급속히 전파되어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여성의 교육기회, 취업과 사회활동 기회, 여가활동의 기회 등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개인주의, 부부중심의 핵가족, 평등사상 등이 확산되면서 여성의 인간해방과 각종 불평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욕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75년을 전후해 우리 나라에서는 여성문제를 이론적으로 연구, 교육하며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활발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특히 1977년부터 시작된 대학의 여성학 수업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여성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해결 방안 모색에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물결 속에, 민주적 여성단체들이 조직되고 성폭력 등 여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대되어 갔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남존여비사상이나 남녀차별의 규범과 제도는 사회 곳곳에서 여성문제 해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성문제는 구체적으로 남녀불평등의 문제이며, 결국 인권문제에 귀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문제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장애가 되는 사회 구조와 제도, 규범과 가치체계들로 그 쟁점이 집약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표출되고 있는 여성문제의 핵심은 아직도 남녀유별의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몇 가지 주요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남아선호’라는 문화적 가치가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어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기회가 그만큼 근원적으로 제약되는 불리한 출발을 한다.
둘째, 자라는 과정에서 여성은 일정한 고정관념에 따라 사회화된다. 여성은 다소곳하고 순종적 · 피동적이며, 포용력있는 성품과 반듯한 행실, 여성다움이 몸에 배도록 양육된다. 그 결과 성인이 된 뒤에도 여성은 독립적인 역할에 익숙하지 못하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비대칭적 관계 속에 살도록 길러진다.
셋째, 공식화된 사회화의 기제(agent)인 학교교육마저도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교육받을 기회가 제한된다. 1980년의 경우 초등학교 취학률이 남자 100.3%, 여자 100.9%였으나, 중학교는 남자 97.1%, 여자 92.1%, 고등학교는 남자 75.5%, 여자 63.3%이며, 초급대학 · 전문학교 이상은 남자 22.5% 여자 10.0%이다. 즉, 고등교육에서 여자 취학률은 남자보다 크게 떨어져 교육상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교과과정 등 교육운영에서의 실질적인 남녀차별은 여전히 완화되지 못했다.
넷째,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여성의 취업기회는 훨씬 제한되어 있다. 남성에 비해 취업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1987년 경제활동인구 중 남자 80.5%, 여자 48.3%), 문호가 개방된 직업의 종류도 한정되어 있으며, 직업상의 지위도 남성에 비하여 낮고, 승진기회 또한 극히 폐쇄되어 있다. 1980년 직업별 남녀취업자 구성비를 살펴보면, 여자는 생산 · 운수직 종사자가 가장 많고(여자 25.5%, 남자 38.7%), 그 다음 농림업(여자 24.2%, 남자 9.9%), 판매종사자(여자 17.4%, 남자 13.3%), 서비스직(여자 16.3%, 남자 7.1%), 사무직(여자 10.5%, 남자 12.2%) 및 전문기술직(여자 5.74%, 남자 6.5%)의 순이고, 행정관리직은 0.1%(남자 2.1%)뿐이다.
또한 여성취업자는 대부분 고졸 이하의 학력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여성들은 직업을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사장되어 있거나 오랫동안 취업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한정된 전문직종을 제외하면 같은 학력,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심하다. 예를 들면, 1981년의 경우 각 직종 내의 남녀임금격차의 비율은 농림어업부문이 2.3:1로 가장 높고, 생산사무직이 2.0:1, 판매 · 서비스직 및 전문기술직이 1.5:1, 행정관리직이 1.2: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결혼을 하기 위한 배우자 선택 과정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자유로운 사귐과 성적 경험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혼전 성경험이 혼인조건에서 여자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그밖에도 결혼조건을 따질 때 여성의 경우 훨씬 더 까다로운 것이 일반적이다. 혼인한 뒤에도 대체로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된 지위를 강요받으며, 가사노동과 자녀생육의 여성구실에 매이게 된다. 여성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경우에도 가사노동과 함께 자녀생육은 대부분 여성의 일로 남아 있다.
여섯째, 법적인 면에서도 여자는 호주가 될 수 없고, 자녀에 대한 친권을 주장하지 못하며, 재산상속에서 남자형제에 비하여 불리하고, 직업을 가진 여성의 경우 각종 사회보장 혜택에서 남성보다 불리한 법 적용을 받는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발전을 통한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여성문제에 접근하여야 하며, 이는 여성만의 과제가 아닌 남성을 포함한 사회전체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여성해방이라는 개념은 여성만의 해방이 아니라, 남성해방과 함께 하는 인간해방, 즉 모든 사람의 인간회복을 뜻한다.
1990년대 한국 사회는 1980년대의 힘찬 민주화투쟁이 나름대로 결실을 본 사회였다.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는 동구권과 소련에서 정치 · 사회 ·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특히 독일의 통일은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의미로 충격적이었으며, 한국 사회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운데 문민정부의 출범과 지방 자치제 실시는 생활정치라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요구하게 되었고, 여기에 여성들의 보다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과 활동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문민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 이래 깊이 뿌리내린 정경유착의 고리는 결국 IMF라는 국제통화관리체제를 초래하여 엄청난 국가적 수모와 국민 생활상의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때문에 1997년 12월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최초의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성문제는 또다시 사회적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화되는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여성 사회는 변화 · 발전의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1990년을 전후해서 등장한 일제강점기 때의 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성에 대한 담론이 공론화되었고, 여성 관련의 법적 제도적 장치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둠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변화 · 상승하였다. 1994년의 국회 여성특별위원회와 1995년의 대통령 직속 세계화추진위원회의 설치는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부와 행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요 여성정책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여성공무원을 10% 이하로 못박았던 공무원 임용 시행령이 1989년 개정되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과거 특수여성 상대의 여성정책이 일반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원칙으로 바뀌었다. 1991년 여성전용 직업훈련원이 신설되었고, 여행원 분리모집제도 폐지되었으며, 1994년에는 국회 내에 여성특별위원회가, 1995년 6월에는 대통령 직속 기관인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의 세계화”를, 정당 차원에서는 민주당 정책위원회 안에 여성전문 위원을 두었다. 아울러 1998년에는 정무 2장관 대신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된 데 이어 정당 차원에서도 여성정책 개발을 위한 별도의 부서를 두고, 교육부 · 농림부 · 법무부 등 정부 6개 부서에 여성정책관을 신설하는 등 21세기 한국여성사회의 발전을 적극 모색하게 되었다. 1999년 말에는 남녀 고용 평등을 위해 군가산점제를 폐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같은 여성 발전의 모색에 따라 여성들의 고위 관료 등 고급 공무원으로의 진출을 보장하는 할당제, 초등학교를 비롯한 학교 급식의 정착, 삼사관 학교를 비롯한 특수 학교의 여학생 입학 허용 등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배려도 커져갔다.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우선 교육면에서 1998년 통계는 초 · 중 · 고등학교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학교에서는 남자 92%에 여자 50.5%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995년 교과과정에서 가정, 실업 교과의 남녀차별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남자학교와 여자학교를 따로 두고 교사들의 교과 운영과 진로 지도 상의 차별적 사회화는 계속되고 있다.
1990년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자 74.0%, 여자 47.0%, 1995년 76.5%, 48.3%, 1998년 75.6%, 49.5%로 여성 참가율이 조금씩 향상되었다. 특히 1993년을 기준해서 보면 여성노동의 60%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사무직 전문기술 행정관리직 진출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10인 이상의 기업체 종사자 중 과장급 이상 상위직은 5% 미만으로 저조하며, 평균임금에서 남성대비 56.5%, 초임은 70%로 여성이 직장생활을 오래해도 남성에게 밀리는 현상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 참여 증가는 이제 질적으로도 남녀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은행 등 각 기업체에서 여성중견 간부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기혼여성의 재취업 현상도 뚜렷하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필수요건인 탁아시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국회의원은 1995년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1%에 지나지 않아 세계 평균 11%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 평균 9%에도 크게 미치지 못해 아태지역 13개국 중 12위의 수치를 면치 못하였다. 또 1991년 광역의회 선거에 당선된 여성은 8명(0.9%), 1992년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지역구 의원 237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으며, 다만 전국구에서 3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1992년 3월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124명의 여성후보가 출마하여 서울의 22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38명이 당선하는 부진함을 보였으나 1995년 6월 지자제선거에서는 비교적 좋은 성과를 보였다. 즉, 여성후보 252명 중 86명이 당선되어 전체 5,661명의 당선자 가운데 1.5%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 당선 여성 중에는 20∼40대의 젊은 여성들과 경실련, 한살림협동조합 등을 통해 활동했던 환경운동가와 지역 단위의 시민여성운동가들이 나왔다. 이러한 결과는 앞으로 여성의 정치적 역할에 밝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95년 현재 시청, 구청, 동사무소 등의 전체공무원 2,146명 가운데 여성이 20.5%인 442명이나 되어 최근 2∼3년 사이에 90% 이상의 증가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여성은 능력에 따른 정당한 부서 배치는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든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여성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고, 많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활동가들도 현장의 경험을 살려 전문화, 대중화의 길로 나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여성문제를 전체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 보기보다 오히려 핵심보다는 부차적 문제가 중심문제인 것처럼 논하게 되는 부작용이 따랐다. 그러나 문화와 심리생활 쪽으로 다양하게 확산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특히 여성 관련법과 제도의 정비는 두드러졌다. 먼저 1990년 시행된 개정 「가족법」은 호주의 권리 의무조항을 대폭 삭제하고, 호주상속을 호주승계제로 바꾸었으며, 이혼시 재산분할청구권을 신설하고, 친권제도 재산상속제도 등의 규정을 개정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동성동본혼인을 금지하는 민법에 위헌 판결을 얻어냈다. 이외에도 1997년에는 「국적법」을 개정하여 자녀국적은 부모양계주의를, 부부국적은 선택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99년 말 정기 국회에서도 동성동본불혼 조항을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여 혼란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1987년 제정되고, 1989년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남녀균등대우원칙을 구체화시켜, 모집 · 채용 상의 차별(군필 남)과 교육 승진 과정에서 여자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 임금과 1년의 육아휴직을 근속기간에 포함시킨다고 하였다. 1989년 모자복지법, 1991년 영유아보육법의 제정과 1997년 개정, 1995년의 고용보험법 등과 함께 1994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 제정, 1995년의 「남녀고용평등법」을 개정하였다.
이와 함께 1995년의 「여성발전기본법」, 1997년의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1999년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 등은 종래의 성차별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보다 확실하게 한 것이다. 동시에 1995년에 개정 시행된 윤락행위 등 방지법(1961년 원안)은 이제까지 성(性)을 파는 행위만 처벌하던 이중적 성윤리에서 벗어나 성의 매매, 그 조장 행위, 매매춘을 위한 인신매매 등을 모두 처벌하는 것으로 진일보하였다.
이같은 법적 장치의 보장은 김부남 사건, 김보은 사건 등의 근친강간을 비롯한 갖가지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심화되고 공개 토론이 가능해지자 여성단체의 쉼터에서 피해여성 보호 대책과 예방책 마련 등 여성운동의 성과와 함께 이뤄진 것이었다. 동시에 1990년대의 서울대학교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승소 판결도 여성에 대한 성적 인식을 확실하고 새롭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한편 아내 폭행을 비롯한 일체의 가정폭력 방지운동은 1997년 가정폭력 방지법을 제정케 하였으며 그 밖에도 매매춘과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 등 소외된 여성들의 문제도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근래들어 여성단체에서 북한여성연구와 독일 통일 후 독일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평화통일운동에의 여성 역할도 기대된다. 동시에 유엔인권소위의 군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나 1995년 베이징(北京) 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한국여성은 국제적 연대의 장을 적극 활용하고 민족문제,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주체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 들어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자녀 하나 낳기는 남아선호도를 더욱 부채질한 결과를 초래하여 성비의 불균형현상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남녀 차별을 드러내 보이는 현상으로 이같은 가부장제 의식은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