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절 ()

해평열녀사
해평열녀사
가족
개념
여성의 도덕 개념으로, 여성이 정절 또는 절개를 지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사회용어. 수신.
내용 요약

수절은 여성의 도덕 개념으로, 여성이 정절 또는 절개를 지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절(節)은 정(貞), 열(烈) 등과 결합하여 성적 순결과 타인에 대한 충실성을 포함한다. 정절의 사례나 행위가 다양해지면서 남편이 죽은 후에 그 아내가 선택한 행위를 유형화하여 정부, 절부, 열부로 구분했다. 풍속과 교화의 정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정절녀를 발굴하는 정려 사업을 활성화했다. 이 결과 조선 후기에는 수절하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수절은 부계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나온 아내의 성 관리의 기제라 할 수 있다.

정의
여성의 도덕 개념으로, 여성이 정절 또는 절개를 지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사회용어. 수신.
정절의 개념

절(節)은 정(貞) · 열(烈) · 개(介) 등과 결합하여 성적 순결과 타인에 대한 충실성을 포함한다. 즉 정절(貞節) · 열절(烈節) · 절개(節介) 등의 용어는 절(節)의 신념을 표현한 개념이다.

유교적 여성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열녀전(列女傳)』에는 정절의 ‘정(貞)’을 몸과 정신을 포괄한 성적인 순결의 의미가 강한 것으로 썼고, ‘절(節)’은 사회적 의무 개념에 가까운 의미로 썼다.

즉 『열녀전』 7편에는 정순편(貞順篇)과 절의편(節義篇)」이 있는데, 정순편에는 개가(改嫁)하지 않았거나 한 남자에게 충실한 여성들을 수록하였고, 절의편에는 조카나 전처 자녀 등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에게 신의를 다한 여성들을 수록하였다.

이로 볼 때 고대사회의 정절은 ‘성적 순결’과 ‘타인에 대한 충실성’을 포괄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정절은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남편에게 신의를 다하는 개념으로 축소되어 전개되었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사회는 여성의 성[sexuality]에 대한 일정한 의미 체계를 만들어왔는데, 정절도 그 하나이다. 정절은 성과 결부된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의미 체계로 작용하였다.

러시아의 여성운동가 콜론타이는 “여자의 정조란 단지 성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한 일거일동이 모두 정조라는 철칙아래 움직이고 있다”라고 하여 정절의 위력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정절의 유교적 개념은 기원전 중국 고대 경전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정절은 주로 기혼 여성의 성과 관련되는데, 부계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나온 아내의 성 관리의 기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전개에 따라 정절의 개념에도 변화가 왔다. 처음에는 여자의 결혼 횟수와도 관련되다가 여성 일반의 성적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대되었고, 궁극에는 ‘올바른 성’을 표상하는 대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부계혈통의 확인과 보장이라는 현실적 요구에서 고안된 정절이 가부장제가 심화되는 역사적 전개에 따라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것이다.

개념의 분화와 정려 사업

정절의 사례나 행위가 다양해지면서 정(貞) · 절(節) · 열(烈)이 구분되기 시작하는데, 즉 개념의 분화가 일어난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 그 아내가 선택한 행위를 유형화하여 정부(貞婦) · 절부(節婦) · 열부(烈婦)로 구분했고, 그 행위를 정절(貞節) · 정렬(貞烈) · 열절(烈節)로 분류했다.

17세기 중국에서 나온 『여범첩록(女範捷錄)』에는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고통스럽게 절개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애통해하고 슬퍼하며 삶을 버리는 것을 열(烈)이라”고 했다. 여기서 ‘열’이란 정절의 극단적 형태를 말한 것으로 반드시 목숨을 버리는 데까지 가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이덕무(李德懋)『사소절(士小節)』에서 정절과 연관된 행위를 좀 더 세분화하여 정의했다. 즉 “남편이 죽고 나서 절개를 지킨 사람을 절부라 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 따라 죽거나 또는 난을 당하여 대항하다 죽은 사람을 열부라 했으며, 혼인 약속만 한 상태에서 신랑 될 사람이 죽어도 계속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정부(貞婦)라 한다.”라고 했다.

풍속과 교화의 정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정절녀를 발굴하는 정려 사업을 활성화했다. 여성의 성(性) 관리를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여긴 것인데, 절부 발굴과 열녀 포상의 5백년 역사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결과 조선 후기에는 수절하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에 정절로 국가의 관심과 사회적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일상적이지 않은 방식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쏟아져 나온 열녀들은 대부분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좇아 자결하는 것을 뜻하는 ‘하종(下從)’을 택한 경우들이다.

열녀를 권장하는 담론들은 『사기(史記)』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얻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는 것과, “굶어죽는 것은 작은 것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것이다[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는 송대 성리학자 정이(程頤)의 말을 주로 인용했다.

참고문헌

『여사서(女四書)』(왕상 저, 이숙인 역주, 여이연, 2003)
『열녀전(列女傳)』(유향 지음, 이숙인 옮김, 예문서원, 1996)
『정절의 역사』(이숙인, 푸른역사, 2014)
『열녀의 탄생』(강명관,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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