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全州李氏)이며 아버지는 평양감사(平壤監司) 이창수(李昌壽),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문통(文通)』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유희(柳僖)의 고모이며, 유희의 아버지인 목천현감(木川縣監) 유한규(柳漢奎)와는 남매지간이다. 또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지은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는 남편이 유한규이므로 빙허각 이씨의 외숙모가 된다.
빙허각 이씨는 가학의 전통 속에서 자랐는데, 남편인 서유본(徐有本)의 문집인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에 따르면, 남편과 한시를 주고받을 만한 시재(詩才)가 있었다고 한다. 빙허각 이씨는 15세 되던 해인 1773년(영조 49) 달성 서씨(達成徐氏) 서유본과 결혼하였다. 서유본의 친가는 명망 있는 소론의 가문이었으며, 외가도 학문에 일가를 이룬 가문이라, 집안에는 항상 많은 장서들이 있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 1명과 딸 2명만을 남기고 모두 어려서 죽었다. 남편인 서유본은 40세가 넘어서 벼슬에 오르지만 숙부 서형수의 옥사 때문에 벼슬에서 일찍 물러났다. 이런 까닭에 집안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져서 빙허각 이씨는 몸소 차밭을 일구며 생활하기도 했다. 이때 자신의 생활지식과 실학서의 내용을 종합한 가정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저술하였다.
1822년(순조 22) 남편 서유본이 사망하자, 남편을 위해 「절명사(絶命詞)」를 짓고는, 이후 모든 인사(人事)를 끊은 뒤,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은 채 자리에 누워 19개월만인 1824년(순조 24)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빙허각고(憑虛閣稿)』에 수록된 그의 자작시 백 수십 수가 전하는데, 그 시에 우리 글로 대역(對譯)을 붙여 놓았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를 엮은 서유구(徐有榘)는 서유본의 아우로 어려서 그 형수 빙허각 이씨에게 글을 배웠다고 전한다.
저서로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 3부 11책이 전하는데, 제1부는 『규합총서』 5책으로 1809(순조9년)에 저술하였다. 제2부는 『청규박물지(淸閨博物志)』로 4책이며, 제3부는 『빙허각고략(憑虛閣稿略)』인데, 현존하는 것은 제1부인 『규합총서』와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의 『청규박물지』이다. 나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남편인 서유본의 문집인 『좌소산인문집』은 현재 일본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