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제사의 하나인 국가 시조에 대한 제사로서, 전통적인 ‘능(陵)=묘(廟)’의 관념에 따라 시조의 죽음과 관련된 장소에 사당을 건립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조상 숭배의 관념에 따라 각 씨족(氏族)의 시조(始祖)를 신격화하고 숭배한 것은 원시시대부터였다. 그 뒤 씨족 간에 정복 전쟁이 일어나고 사회가 분화 및 발전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원시 사회가 해체되고 고대 국가가 출현하였다. 그 결과 왕실로 등장한 우세 집단은 피정복 집단의 씨족신(氏族神)들을 서열화하고 그 정점에 자기 집단의 씨족신을 앉힘으로써, 왕실의 시조신은 고대 국가의 국조신(國祖神) 또는 민족신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국가형성 단계에 돌입하면서 지배자는 천(天)의 자(子)혹은 천의 손(孫)이라는 의식을 점차 강조하였다. 이에 삼국에서는 각각 천강신화(天降神話)를 낳고 그 천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수단으로써 시조에 대한 묘를 세웠다.
이러한 시조묘제례는 고대국가형성의 가장 큰 징표이며, ‘대국(大國)’이라는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소국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것이, 대국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천의 자손에 대한 제례로 발전된 양상이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부터 시조묘제사와 함께 천지신제사가 이루어졌으나 신라는 뒤늦게 천지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 · 백제와 사회발전에 있어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조묘(始祖廟)는 바로 국조신에 대한 의례를 객관화 · 제도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시조묘에 대한 제사 의례는 왕자(王者)의 정통성 및 권위의 원천이다. 왕은 즉위 직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국민에게 알리는 상징적 의례로서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즉위 의례 또는 고유[告由: 국가나 일반 개인 집에서 큰일을 치른 뒤에 그 이유를 사당(祠堂)이나 신명(神明)에 고하는 것] 의식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짐에 따라 시조신은 단순한 혈연상의 신에 머물지 않고 농경신 · 곡령신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제사 의례 또한 농경 생산의 유지 · 발전을 의도했으며, 이때 왕은 날씨에 대한 신의 예언을 공동체 성원에게 알리는 샤먼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한편, 시조묘의례를 제천의례나 농경의례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신라의 경우 그것은 일종의 종묘제례로서 왕위계승과 관련된 정치세력에게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례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시조묘를 설치한 것은 비교적 고대 국가 형성기의 초기로 보이나, 기록에서 처음 제사를 지낸 것은 167년(신대왕 3) 9월이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시조묘는 존속하였다. 시조신은 동명왕인 주몽(朱蒙)이며, 그 성격은 주로 농경신 · 곡령신이고 부분적으로 수렵신도 포함된다.
3세기 이전의 시조묘에 대한 제사 의례는 수확제 중심이었으나, 고구려가 정복 국가로 성장해 중국 문물을 수입하는 4세기 이후부터는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예축제(豫祝祭)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에는 순문(巡問: 순시) · 진급(賑給: 흉년이 들었을 때 빈민에게 곡식 등을 주어 구제하는 일) · 여수(慮囚: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죄수를 용서하고 놓아주는 일)의 기능도 첨가되었다. 고구려에는 시조묘 이외에도 신묘(神廟) · 태후묘(太后廟)가 있었다.
백제는 서기전 18년(온조왕 1) 5월 동명왕 묘를 건립한 이후 동명왕을 시조신으로 숭배하였다. 백제의 건국 시조인 온조(溫祚)를 대신해, 고구려와 같이 동명왕을 시조신으로 모신 것은 백제 건국의 주체 세력이 고구려 건국의 주체 세력과 같은 종족 계통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백제는 406년(전지왕 2) 1월 이후로는 시조묘에 대한 제사 기록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던 백제가 5세기 무렵 중국적인 제사관을 도입해, 종래 시조묘에서의 농경제사를 폐지하고 대신 천단(天壇)을 설치해 천지신(天地神)에게 제사 지내는 유교적 제례를 확립한 것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
신라는 6년, 즉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4∼24) 3년 1월에 처음으로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장으로 왕의 누이인 아로(阿老)를 임명해 사계절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다. 시조묘의 주신(主神)은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곡령신(穀靈神)의 성격을 띠었다. 남해차차웅 이후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즉위 의례로서 이사금(尼師今) 시기까지 거의 모든 역대 왕에 의해 유지되었다.
한편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김씨(金氏)에 의한 왕위 독점이 확립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국왕의 성격과 더불어 시조묘 제사의 내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487년(소지마립간 9) 2월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면서 종래 시조묘의 역할을 신궁이 대신하게 되었다.
신궁 설치 이후 시조묘에 대한 기사는 신라 말인 801년(애장왕 2) 2월, 813년(헌덕왕 5) 2월, 833년(흥덕왕 8) 4월의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특히 신라 중고기(中古期)와 중대(中代)에는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시조묘와 신궁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승관계설과 병존관계설로 크게 나누어지며, 그와 관련해 신궁의 주신도 박씨 시조설, 김씨 시조설, 태양신설 또는 천지신설 등이 있다. 한편 신라 중대 초인 신문왕(神文王, 681∼691)대에 중국적 종묘(宗廟) 제도로서 오묘제(五廟制)가 등장했으며, 그 주신은 김씨 시조신과 왕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신라의 묘제가 이처럼 시조묘→신궁→오묘제로 변천해 간 것은 신라 사회의 발전과 왕실 세력의 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박씨에서 석씨, 다시 김씨로의 왕위 계승, 김씨족 내에서 가계의 분화에 따른 가계 간의 왕권 교체, 그리고 사회의 분화 · 발전과 중국 유교 문화의 수입 · 정비에 의한 왕자(王者)의 샤먼적 성격의 탈색 등의 변화는, 농경신으로서의 박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의 기능을 제한 · 축소시켜 나갔다.
시조묘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묘제의 최초의 모습으로, 그 역할과 기능이 신궁과 오묘제로 계승,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고려 · 조선시대의 묘제인 원묘(原廟)와 종묘제(宗廟制)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