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발표에 반대해 약 1년간 전 사회적으로 전개된 운동.
배경
발의자라고 자처하는 오천석(吳天錫)에 의하면 국대안 제안 배경에는 정부 재정 낭비의 방지, 종합대학의 교육적 이점 , 종합대학 건설에 대한 바램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폐교 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의 학교제도를 계승해야 할 이유가 없고 나아가 자교 출신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 패권주의가 강하여 이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좌익 배제, 미군정의 고등교육에 대한 효율적 통제의 필요성, 미군정 교육 관계자들의 교육개혁 주도권 장악 등의 의도 역시 작용했다. 또 통일정부의 수립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업무 방식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 한편 한국인 관료의 주도성이 높아지면서 미군정의 한국인 관료 주도로 남한만이라도 전면적 개혁을 하여 독자적으로 국가고등교육제도를 수립하고자 개혁이 구상되었다. 재정 효율화, 행정 편의성 등의 현실논리를 내세우면서 다소 성급하게 추진되었으나 일본식 대학인 제국대학의 청산이라는 명분이 전면적 개혁을 추구하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경과
국립서울대학교 설치가 법으로 확정되자, 각 단과대학에서는 교직원 및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립서울대학교로의 통합을 거부하며 반대성명을 내거나 사직 결의를 표명하고, 등록을 거부하였다. 1946년 9월 18일 신규 신입생 등록 및 기존 재적생의 재등록을 받아 재적자 8,200여명 가운데 약 5천명이 등록한 가운데 국립서울대학교는 역사적인 개학을 하였으나 개강은 준비 부족으로 곧 할 수가 없었고, 등록 인원의 부족으로 인한 재적 정원의 미달은 9월 23일까지 각 전문학교로부터의 편입생으로 채워나가 9월 말까지 6,671명의 등록 학생을 받아들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이 법으로 정해진 이후 전개된 국대안 반대 운동은 그 초점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새로 도입된 행정적 절차 및 규정의 시행에 대한 불합리성이 지적되었다. 둘째, 인사문제로 구교수의 전원 복직 및 한국인 총장, 처장의 임명이다. 셋째,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이다. 넷째, 국대안 반대운동에서의 가장 큰 논쟁점은 역시 이사회 문제였다. 국대안 반대운동의 정점은 1947년 2월경이었는데,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동맹휴학한 대학이 57개, 동맹휴학한 학생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한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지지하는 국대안 지지운동 또한 벌어졌다.
결과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김기석, 『한국고등교육연구』(교육과학사, 2008)
논문
- 강명숙, 「미군정기 고등교육 연구」(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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