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안(國大案)'이란 1946년 7월 13일에 발표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약칭이다. 이에 반대하여 교육계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1여년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발의자라고 자처하는 오천석(吳天錫)에 의하면 국대안 제안 배경에는 정부 재정 낭비의 방지, 종합대학의 교육적 이점 , 종합대학 건설에 대한 바램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폐교 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의 학교제도를 계승해야 할 이유가 없고 나아가 자교 출신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 패권주의가 강하여 이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좌익 배제, 미군정의 고등교육에 대한 효율적 통제의 필요성, 미군정 교육 관계자들의 교육개혁 주도권 장악 등의 의도 역시 작용했다. 또 통일정부의 수립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업무 방식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 한편 한국인 관료의 주도성이 높아지면서 미군정의 한국인 관료 주도로 남한만이라도 전면적 개혁을 하여 독자적으로 국가고등교육제도를 수립하고자 개혁이 구상되었다. 재정 효율화, 행정 편의성 등의 현실논리를 내세우면서 다소 성급하게 추진되었으나 일본식 대학인 제국대학의 청산이라는 명분이 전면적 개혁을 추구하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국대안이 발표되자 찬성과 반대의 의견들이 여러 곳에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상당수의 학생과 교수들은 첫째, 학생 수용능력이 줄어들며, 둘째, 교수의 부족을 더욱 심화시키고, 셋째, 경비 절감이 이루어질지 의문이고, 경비 문제로 고등교육기관을 정비하는 것은 비교육적이라는 것, 넷째, 학교 운영에 있어서 관선의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 전권을 주는 것은 학원의 자치 및 학문의 자유를 해치며, 다섯째, 이공, 과학 계통의 고등교육을 경시하게 된다고 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여 국대안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 설치가 법으로 확정되자, 각 단과대학에서는 교직원 및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립서울대학교로의 통합을 거부하며 반대성명을 내거나 사직 결의를 표명하고, 등록을 거부하였다. 1946년 9월 18일 신규 신입생 등록 및 기존 재적생의 재등록을 받아 재적자 8,200여명 가운데 약 5천명이 등록한 가운데 국립서울대학교는 역사적인 개학을 하였으나 개강은 준비 부족으로 곧 할 수가 없었고, 등록 인원의 부족으로 인한 재적 정원의 미달은 9월 23일까지 각 전문학교로부터의 편입생으로 채워나가 9월 말까지 6,671명의 등록 학생을 받아들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이 법으로 정해진 이후 전개된 국대안 반대 운동은 그 초점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새로 도입된 행정적 절차 및 규정의 시행에 대한 불합리성이 지적되었다. 둘째, 인사문제로 구교수의 전원 복직 및 한국인 총장, 처장의 임명이다. 셋째,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이다. 넷째, 국대안 반대운동에서의 가장 큰 논쟁점은 역시 이사회 문제였다.
국대안 반대운동의 정점은 1947년 2월경이었는데,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동맹휴학한 대학이 57개, 동맹휴학한 학생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한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지지하는 국대안 지지운동 또한 벌어졌다.
이사회에 의한 대학 운영은 유지되었지만, 미군정이 임명한 미국인 관료로 구성된 이사회를 철회하고, 한국인으로 이사회를 구성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법이 1947년 5월 6일 법률1호로 개정되자,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은 퇴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