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졌고, 그 여파로 많은 학생단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 동안 국내의 유일한 학생단체로서의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의미도 퇴색하게 된다.
1924년 9월에 조직된 조선학생총연합회(朝鮮學生總聯合會)와, 1925년 5월에 조직된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조선공학회(朝鮮共學會)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생단체였다. 그러나 공학회는 조직된 지 6개월 만에 일제 당국에 의해 해산되어 큰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하는데, 이와 비슷한 성격의 학생단체, 학생비밀결사운동을 촉구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공학회가 해산을 당하자, 거기에 소속되었던 학생 중의 일부가 사회주의 단체 화요회계(火曜會系)와 제휴, 1925년 9월 27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사회과학 보급, 학생의 사상 통일과 상호 단결, 인간교육 본위의 실시, 조선 학생 당면 문제의 해결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연구회의 주동인물은 이병립(李炳立)·이선호(李先鎬)·이천진(李天鎭)·박대을(朴臺乙)·백한진(白漢鎭)·염근용(廉近鏞)·현운필(玄雲弼)·백찬세(白贊世)·조완희(趙完熙)·이상각(李相珏)·정달헌(鄭達憲)·조돈원(趙敦元)·이우(李玗)·조광현(趙光賢) 등이었다. 그 날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의 결성집회에는 70여 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조직을 완료한 뒤, 이 연구회는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며 민중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또한 학생들에게 과학과 과학사상을 보급시키기 위한 학술강연회를 계속 개최하였다.
같은 해 10월 제1회강연회로서 송일영(宋一英)의 「상대성원리에 대하여」, 이긍종(李肯鍾)의 「경제사상의 역사적 변천」을 가지고 YMCA에서 개최하였고, 제2회강연회를 11월 같은 장소에서 이관용(李灌鎔)의 「구사회의 과학과 신사회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하였다.
그 해 11월 28일 제1회과학강좌로서 윤병섭(尹炳燮)의 「생물의 진화에 대하여」를 가지고 교육협회에서 개최하였고, 1926년 4월 22일에는 내청각(來靑閣)에서 칸트(Kant,I.)의 202회탄신기념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