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李泳禧)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아버지 리근국과 어머니 최희저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으로 이주해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의 딸이었다. 본관은 평창(平昌), 호는 향사(鄕史)이다. 삭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공업학교에 다니던 중 8 · 15광복을 맞았다.
이후 국립해양대학교(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가 되었다. 1957년 소령 예편 후 기자가 되어 1957~1964년 합동통신 외신부, 1964∽1971년 조선일보사와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을 지냈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석사과정 수료 후 1972~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6년 해직되어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에 복직되었다, 2010년 12월 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리영희는 기자로 4 · 19혁명을 경험하고 조선일보사 외신부에 근무하며 1964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관련 기사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구속되는 필화사건을 겪었다. 외신부에 근무하면서 국제 정세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갖추게 되어 비판적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한국 상황에 대한 기사를 미국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등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권과 신문사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사에서 반강제로 퇴사하고 합동통신사로 이직하였으나, 1971년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해 재차 해직되고 한양대 교수로 이직하였다. 1972년 3월 18일 결성된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이사로 참여하였다.
1976년 대학에서 해직되어 저술 활동 중 1977년 11월 2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80년 1월 19일 만기 출소하여 대학에 복직하였으나, 5월 15일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하였다가 재차 해직되었다.
1980년 5월 17일에는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조사받고 풀려나기도 하였다. 1984년 7월 17일 4년 만에 복직되어 대학으로 돌아왔다. 1988년 『 한겨레』 창간에 참여하고 한겨례신문사 논설고문 및 이사직을 맡았다. 1989년 『한겨레』의 방북 취재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의해 구속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평생 9차례 연행되고, 5차례 구속되었으며, 세 차례 기소되어 총 1,012일간의 수감 생활을 하였다. 2003년에는 이라크전 파병 반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4년 사회비평서인 『전환시대의 논리』, 1977년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출간한 이래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역설의 변증』, 『역정-나의 청년시대』, 『자유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베트남전쟁이나 중국과 같은 국제문제로부터 한국의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부한 글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 활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1980년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비판적 안목으로 국제 정세와 한국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사상의 은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였다. 자유주의로부터 사회주의를 아우르며 민족주의를 포괄하는 등 폭넓은 사상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1989년 주한외국인기자협회 자유언론상, 1995년 단재학술상, 1999년 제4회 늦봄통일상, 2000년 제4회 만해상 실천상, 2006년 제17회 심산상, 2006년 제1회 기자의혼상, 2006년 제1회 단재언론상,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2008년 제2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2년에는 리영희재단이 출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