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점거농성은,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들 2천여 명이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하는 동안, 경찰 병력이 건국대를 폐쇄하고 강압적인 진압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본관, 사회과학관, 도서관 등 학내 건물로 대피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은 발족식과 집회 이후 해산할 예정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학내 건물로 대피한 상황에서 경찰 병력이 자진 해산을 불허하자 계획에 없던 철야 점거농성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부와 언론은 ‘공산혁명 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으로 규정하고 학생들을 ‘빨갱이 도시 게릴라’로 매도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10월 31일 아침에 53개 중대 8천 명의 경찰 병력과 헬기 2대까지 동원해 1,447명을 연행하고 1,288명을 구속하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애학투련은, 1986년 3월에 결성된 비합법 학생운동 조직인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이 같은 해 4월에 공개투쟁기구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구성한 이후,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발족했다.
주요 투쟁 목표는 반미자주화, 반독재민주화, 조국통일이었다. 당시 세계적인 냉전과 남북대립이 공고한 상태에서 반미와 통일에 관한 애학투련의 문제제기는 선도적이기는 했지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강력히 존속하는 와중에 미국과 한국사회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일부 차용함으로써 당시 정부가 이 사건을 용공 사건으로 규정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애학투련은 발족과 동시에 해체되었지만, 그 주요 투쟁 목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