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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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난 뒤 외적 조건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내용 요약

실향민은 고향을 떠난 뒤 외적 조건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을 지칭한다. 좁은 의미로는 6·25전쟁 때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납치된 뒤 휴전 협상에서 송환이 논의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늘날 실향민은 남북분단과 6·25전쟁으로 발생한 민족대이동의 결과로 월남한 자와 분단 후 남한에 정착한 북한 출신자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로는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연해주·일본(사할린 포함)·하와이 등지로 자의든 타의든 간에 고향을 떠난 사람을 포함한다. 실향민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회계층에 분산, 융합되어 있다.

목차
정의
고향을 떠난 뒤 외적 조건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내용

실향민이란 말은 좁은 의미로는 6 · 25전쟁 때 남한에 거주하다가 북한으로 강제납치된 뒤 휴전협상에서 그 송환문제가 논의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휴전협정에는, ① 6 · 25전쟁으로 남북한에서 월경한 자로서 귀향을 원하는 자의 송환을 도우며, ② 외국인 사민(私民)의 귀향을 허용하고, ③ 양측의 영관급 장교 각 2명씩으로 실향사민(失鄕私民) 귀향협조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내용의 실향사민 송환을 위한 규정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실향민이라는 말은 1945년 8 · 15광복과 함께 야기된 남북분단과 1950년 6 · 25전쟁으로 발생한 민족대이동의 결과 공산주의사회체제를 반대하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자와 분단 후 남한에 정착한 북한출신자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보다 넓은 의미로는 1910년 국권상실 후 만주 · 연해주 · 일본(사할린 포함) · 하와이 등지로 경제적 궁핍과 일제하의 전시강제동원에 의해 자의든 타의든간에 고향을 등지고 조국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을 이 개념 속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실향민은 6 · 25전쟁 때 북한에 의해서 강제납치된 납북인사들을 뜻하는 것으로서, 북한은 남침 후 점령지역에서 요인체포와 이른바 반동분자의 숙청을 주요정책의 하나로 삼았다. 6 · 25전쟁 초기에 초기에 체포된 요인들은 대부분 2차에 걸쳐서 납북되었다. 1950년 7월 하순에 있었던 1차납북자는 주로 당시의 정계요인들로서 협상파 · 자수파 · ‘국회푸락치사건’ 관련자 등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이었으며, 8월 중순의 2차납북자는 이른바 반동관료 및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체포 ·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북한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7월 말부터 서울시민을 상대로 이른바 ‘전출’이라는 명목 아래 납북을 획책했다. 9월 하순 인민군의 패주 북상 때에는 수감자들에 대한 현지처형과 강제납북을 병행하였다. 특히 접경지역인 서울 · 경기 · 강원지방 주민들에 대해서는 강제납북을 강행했으며, 호남경북지방 주민들은 지리산을 비롯한 유격전지대에 강제 입산시켰다. 6 · 25전쟁 때에는 납치 · 학살 · 실종 등이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납북인사의 수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당시 내무부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북한에 의한 민간인 납치자수를 8만 4532명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1952년 9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18차 국제적십자사 회의에서 대한적십자사는 결의사항 제20호 ‘ 이산가족의 재회문제’에 의거하여 납북인사 1만 7500명의 행방조사와 송환을 국제적십자사에 요청한 바 있다.

실제 휴전당시 북한을 탈출하여 실향하게 된 사람은 5백만이 넘는다. 1956년 대한적십자사가 휴전협정의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그해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실향사민 재등록을 실시한 결과 재등록자 수는 7,034명이었다.

이에 대해 1957년 11월 뉴델리에서 열린 제19차 국제적십자사회의에서 북한적십자사는 위의 7,034명의 납북인사 중 337명의 생존자명단만을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하였을 뿐이다. 넓은 의미의 실향민으로서 공산학정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월남한 북한출신의 실향이동은 크게 ① 광복 직후와 ② 6 · 25전쟁의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광복 후 김일성일파는 1945년 북한으로 들어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 3월부터 토지개혁령을 비롯하여 중요산업국유화령 · 농업현물세제 · 애국미헌납운동 등 일련의 탄압개혁정책을 전개하였다. ‘20개 정강’이라는 공산화 기본방침을 선포하여 ① 일제잔재의 숙청, ② 반공정책 단체 · 개인 등 이른바 반동분자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집단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지주 · 종교인(특히 천주교기독교인) 및 지식인, 그리고 이 무렵 창설된 인민군의 강제징집에 반대하는 청년 등의 많은 인구가 공산학정을 피해서 육로와 해상을 통하여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6 · 25전쟁 당시에는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국제연합군이 38선 이북에 진주하였다가 그해 10월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철수하게 되자 공산학정을 거부하는 많은 북한주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국제연합군을 따라 남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 · 4후퇴이다. 그 중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평양시민의 대동강 탈출, 흥남철수작전, 황해도 서해안지역에 몰려든 피난민의 구출작전 등을 들 수 있다.

광복 후 38선에 의한 남북분단으로 자유를 찾아 북한에서 남하, 월남한 인구수는 6 · 25전쟁 때까지 보사부가 45만 6000명으로, 외무부가 64만 9000명으로 발표하였다. 두 부처 사이에는 약 20만의 차이가 있으며, 1949년에 실시한 국세조사 결과의 공표되지 않은 통계에서는 이 시기의 월남인구를 약 5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당시 공보처 자료에 의하면, 광복 후부터 1949년 8월까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하한 난민수는 350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어느 것이 정확한 수치인지 가릴 길은 없다. 6 · 25전쟁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제연합군이 후퇴할 무렵 공산학정을 피해서 남하한 실향민의 수는 속칭 ‘천만이산가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한 자료는 이 시기에 남하한 북한 피난민수를 89만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1955년에 실시한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의 ‘전입’항목을 통해본 이 시기의 전입자수는 약 45만이며, 대한적십자사는 이 시기의 실향민수를 약 100만으로 추계하고 있다.

광복부터 6 · 25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의 8년간에 있었던 이들 북한출신 실향민의 발생지역과 피난 후 남한에 있어서의 정착 · 분포상황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극히 드물다. 개괄적으로 보면 1960년 국세조사에 나타난 북한지역 출생인구는 약 64만이다. 이들의 출생지를 도별로 보면 황해도가 가장 많아 전체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평안남도가 22%, 함경남도가 21%, 평안북도가 17%, 그리고 함경북도가 5%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출신 실향민의 이러한 출신도별 구성은 1940년부터 1960년까지의 국세조사 결과의 비교분석에서도 유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1983년 한국방송공사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을 통하여 접수된 북한출신 재회희망자의 도별분포도 이것과 매우 유사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광복 후부터 6 · 25전쟁 발발 때까지의 북한 출신 실향민의 남한내 정착상황을 시도별로 살펴보면, 1955년 현재 서울 46.1%, 경기도 15.2%, 강원도 10.5% 등 북한과의 접경지대에 전체의 72%가 집중, 정착해 있다. 그밖에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에 13%가 분포되어 있으며, 타도에 대한 정착성향은 매우 약하다. 또한 이들 실향민의 시 · 군별 분포를 보면, 도시지역에 대한 정착성향이 67%로 매우 높다. 이러한 통계는 북한출신 실향민의 남하이동이 거리적 요인과, 연고없는 피난이동에 기인한 생계유지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6 · 25전쟁 때 있었던 북한 출신 실향민의 남한 내 정착상황은 강원도 26.7%, 경기도 22.2%, 경상남도 21.0% 및 서울 13.1%의 순으로 되어 있어 이들 시 · 도에 대한 정착이 전체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다시 시 · 군별로 보면, 광복기와는 달리 군지역에 대한 정착이 전체의 52%로 높다.

이 시기의 정착지 선택에 있어서는 ① 남하 때 이용되었던 수송수단, ② 군(軍)의 수송지원여부, ③ 전쟁 중 피난의 시간적 여유, ④ 이출지역 등의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1953년 휴전 이후 5백 만이 넘는 실향민의 이북5도민의 원적부(1970년 12월 말 기준)에 근거하여 전국적인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26.93%, 부산 9.25%, 경기 15.13%, 경북 11.87%, 충남 9.68%, 강원 8.29%, 전남 4.50%, 경남 7.46%, 충북 3.83%, 전북 2.57%, 제주 0.50% 등이다.

북한출신 실향민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실향의 시기를 광복 때 또는 6 · 25전쟁 때로 잡더라도, 그 사이 반세기라는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실향민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능력에 따라 모든 사회계층에 분산, 융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월남 1세들의 고향은 분명히 북녘 땅 어느 한 고장이다. 그래서 고향을 물으면 북한의 어느 지명을 대고 곧 향수에 빠져든다. 실향민 2세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부모의 고향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1995년 6월 동화연구소가 실향 50주년을 맞이하여 2세들의 고향의식을 설문조사한 바에 의하면 응답자의 46.4%가 “남한의 어디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고향은 이북 어디라고 말한다.”고 하여 자신이 실향민2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응답자의 42.8%는 “부모님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므로 이북의 지명을 곧바로 댄다.”고 하여 부모님의 이북 땅 고향을 자기 고향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월남 2세들의 89.2%가 강한 뿌리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한에 거주하여 광복 후 남북분단과 더불어 계속 남쪽에 머무른 약 10만의 북한출신자들은 비록 분단으로 실향은 하였지만, 그 사이 그들이 구축해 놓은 남한에서의 사회경제적 기반 아래 상당수의 인사들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지도적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연고없는 피난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마련된 정착지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서울 용산구 남산 기슭의 ‘해방촌’ 난민거주지역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실향민들의 대표적인 생계활동 현장으로서는 남대문의 ‘도떼기’시장, 동대문의 평화시장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월남 실향민의 모체는 주로 풍요했던 지주계층 · 지식인 · 종교인 및 그 자녀들로 이들은 분단과 피난, 남하로 말미암아 가족의 이산과 실향을 체험했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해갔다. 이 시기 실향민 중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군대 · 종교계 · 학계 및 재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 많다.

6 · 25전쟁의 와중에 월남한 이북난민들은 일반 서민층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은 아직까지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다. 북한출신 실향민들은 대부분 공산학정에 반대하여 월남했기 때문에 매우 강한 반공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들은 광복 이후 반공단체 및 반공운동 조직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또한 동향간에 단결력이 뛰어나 이미 광복 초기부터 동향간의 친목과 상조를 위한 각 도의 도민회가 조직되었다.

현재 각 도의 도민회는 도민보(道民報)를 발간하고 있으며, 그 조직이 군민회로까지 확대되어 군민보(郡民報)를 내고 있는 곳도 다수에 이른다. 또한 각종 친목회 · 운동회 · 장학회 등을 조직, 운영하고 있으며, 명절 때에는 합동으로 실향제(失鄕祭)를 개최하기도 한다. 특히 2세 중심으로 부모의 뒤를 이어 체제수호와 통일사업에 헌신해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79년에 ‘평남 중앙청년회’가 제일 먼저 조직되어 1984년에는 ‘이북5도의 청년회의’ 조직에 이어 1990년도에 ‘이북5도 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1992년부터는 명칭이 ‘이북도민 청년연합회’로 개칭되었다. 이들 청년회의 주요활동을 보면 자체 통일연수교육, 경노잔치, 이북도민청년의 날 행사, 향토재건사업단 구성, 국토종단 달리기 등이다.

정부는 이북5도에 대한 국토관념을 명백히 하고 통일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이북5도 지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이북5도청을 열었다. 휴전 후 1959년 11월 「이북5도의 임시행정조치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5 · 16군사쿠데타 이후 1962년 1월에는 「이북5도의 목적과 관장사무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었고 그해 7월 「이북5도위원회규정」이 공포되었다. 이러한 법규정은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북5도청은 관할지역이 수복될 때까지 내무부장관의 지시에 따라, ① 이북5도 각 분야의 조사연구와 수복 때의 시책연구, ② 반공사상의 고취와 이북에 대한 국시선전, ③ 난민구호 및 정착사업, ④ 월남도민 민간단체의 지도육성, ⑤ 기타 민원처리 등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재 이북5도청은 각 도의 도지사를 비롯하여 하위행정단위인 시군 및 면에 이르기까지 명예직의 시장 · 군수 및 면장을 임명해 놓고 있다. 조사연구사업은 1965년 이후 활발히 진행되어 북한실정 · 북한제도연구 · 월남도민실태파악 · 도지편찬 등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반공계몽사업으로는 반공강연 · 대북방송 · 귀순용사환영 · 홍보지발행 등을 정기적 또는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월남 이북5도민의 민간단체로는 도민회를 비롯하여, 시군읍면민회와 부인회 · 청년회 · 장학회 · 민속예술보존회 등 모두 1,200여 개에 이르며, 이를 통해서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자조사업 · 상부상조 · 반공사상고취 · 2세교육지원 등을 꾀하고 있다.

월남 이북5도민에 대한 정착사업은 1951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전라남도 · 전라북도 · 남해안지대를 중심으로 개척가능한 지역에서 자력갱생을 위한 농업정착사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가장 활발하던 때에는 사업장수가 481개, 9만 가구에 이르렀고, 농지조성 실적은 6만 7000에 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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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학』(윤종주, 한얼문고, 1973)
『한국동란』(한국홍보협회, 1973)
『이산가족백서』(대한적십자사, 1976)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청, 1981)
『國勢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40·1944)
『월남반세기』(이북오도위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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