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회담은 6·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한 군사회담이다. 1년 여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공산군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유엔군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유엔군·북한군·중공군 사령관이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6 · 25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유엔을 중심으로 여러 번 시도되었다. 중공군이 6 · 25전쟁에 개입한 직후인 1950년 12월에 미국과 영국이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종결짓기로 합의한 것을 계기로, 1950년 12월 14일 유엔총회에서 3개국협상단(인도 · 이란 · 캐나다)의 구성안이 통과된 바 있었으나 공산측의 반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서방 여러 나라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1년 3월에 ‘현상태의 정전, 휴전기간 중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전 결의안이 다시 유엔에 상정되어 채택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측에서 ‘협상 결과에 따른 휴전, 중국의 즉각적인 유엔 가입, 중국 영토 내에서의 협상’ 등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주장함에 따라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년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지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엔군측으로서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였고,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이전 현상에서의 휴전정책을 확정한데 이어, 공산군측에서도 소련이 중심이 되어 1951년 6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 · 중 · 소 회담에서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휴전회담은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의 유엔방송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협상을 제의하였고, 미국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유엔군사령관에게 공산군측과의 휴전협상 가능성을 타진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쌍방의 연락장교회의를 통하여 절차문제를 합의한 후 7월 10일부터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來鳳莊)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쌍방 대표의 상견례에 이어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측은 협상의제의 선택, 군사분계선의 설정, 휴전 감시 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전쟁 포로에 관한 문제 등 휴전에 선행되어야 할 순 군사적인 문제만을 다루자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산군측은 쌍방이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문제와 한반도로부터 외국 군대의 철수문제를 우선적으로 토의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만을 앞세움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협상 개시 16일 만인 7월 26일에야 비로소 쌍방은 다음과 같은 협상의제와 토의순서에 합의하였다. 양측간에 합의된 협상의제는 제1의제로 협상의제의 채택, 제2의제로 군사분계선의 설정, 제3의제로 휴전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제4의제로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제5의제로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이었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먼저 제2의제인 군사분계선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1951년 7월 17일에 시작된 군사분계선 설정에 관한 협상은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과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공산군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회담이 교착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는 현재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이 관철됨으로써 1951년 11월 27일 쌍방은 군사분계선의 설정 협정에 조인하였다.
그 요지는 첫째,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둘째,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4㎞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셋째, 상기의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는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될 경우에 한하여 유효하다.
넷째, 만일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분계선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당시의 접촉선으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한편 휴전회담이 개시될 때,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협상이 최종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 기간 중의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조건을 공산군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했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공산군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면서 적의 공격 기도를 분쇄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증강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들이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여 군사력을 과시하거나,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엔군 진지 중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실시했다. 그 결과 휴전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이,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제2의제에 합의한 다음날인 1951년 11월 28일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측은 제3의제인 휴전감시방법과 그 기구의 설치문제에 관한 협상에 들어갔으나, 협상이 지연되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제4의제인 포로 교환문제와 제5의제인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문제를 병행하여 토의하기로 하였다.
제3의제와 관련한 주요 협상 내용은 휴전 후 군사력 증강에 대한 규제와 중립국감시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군사력 증강문제는 1952년 2월 23일 휴전 후에도 계속 한반도 내에 주둔하게 될 외국군의 병력 교체를 고려하여 월 3만 5,000명의 병력이 한반도를 출입국할 수 있도록 인정하는 선에서 합의하였다.
그러나 중립국감시위원회의 구성 문제는 소련의 포함 여부를 두고 양측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52년 5월에 재개된 본회의에서 공산군측이 유엔군측 제안을 수락하여 5월 7일 쌍방은 공산군측이 지명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2개국과 유엔군측이 지명한 스웨덴과 스위스 2개국 등 4개 중립국으로 휴전감시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합의하였다.
제5의제인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에 관한 협상은 1952년 2월 7일부터 시작되어 11일 만인 2월 17일에 쌍방이 합의함으로써 협상의제 중 가장 쉽게 타결되었다. 그 요지는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효력을 발생한 뒤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측의 어느 누구도 협상과정에서 포로문제가 주요 의제가 될 것이고, 또 그것으로 회담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포로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들 포로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유엔군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 · 북한 · 중국 또는 대만을 선택하게 하는 이른바 ‘자유송환방식’을 주장한 데 대하여, 공산군측은 모든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 고국에 송환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강제송환방식’을 고집했다.
이로 인해 1952년 2월 27일부터 약 2개월 동안 협상이 중단되었으며, 1952년 10월 8일에는 회담이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쌍방이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은 유엔군측에서 본다면 공산군측의 주장대로 강제 송환을 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주장해 온 인도주의와 자유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공산군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포로의 일부가 귀환을 거부하게 되면 그들이 줄기차게 내세웠던 ‘침략자를 몰아내고 남한을 해방시키다’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이라는 기치가 퇴색되고, 그들이 그토록 주창하던 그러한 전쟁 목적에 의구심을 갖는 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공산군측이 유엔군측의 자유송환방식에 극력 반대한 것은 1952년 4월 10일 유엔군 사령부가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공산군 포로 약 17만 명(민간인 억류자 포함) 가운데 10만 명의 포로가 자유 송환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산군측은 포로 교환에 관한 문제로 휴전회담이 교착될 때마다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 포로수용소 내에서 계획적인 폭동을 일으키도록 조종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1952년 5월 7일에 발생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소장납치사건이었다.
중지와 재개를 거듭하던 휴전협상은 1953년 3월 소련수상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급속도로 진척되었다. 무기휴회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인 1953년 4월 16일 공산군측의 요청에 따라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4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먼저 상병 포로를 쌍방간에 교환하고, 6월 8일에는 그 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 처리방법에 합의함으로써 1년 반 동안이나 끌어오던 포로 교환문제를 해결하였다.
1953년 6월 9일부터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최종적으로 휴전협정 체결에 앞서 군사분계선의 확정, 휴전협정 조인 일자, 비송환 포로의 인도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유엔군측이 억류 중이던 반공 포로 2만 7,000여 명을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석방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구실로 공산군측은 또다시 회담을 중단시켰으나, 유엔군측이 한국군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는 것을 공산군측에 확약함으로써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7월 22일에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7월 23일에는 비송환 포로들을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단에 인계했으며, 7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측 대표 남일이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 중공군총사령관 펑더화이가 각각 그의 후방 사령부에서 휴정협정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본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51년 7월 10일에 개시된 휴전회담이 만 2년 17일 만에 타결됨으로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불법 무력남침을 개시한 지 만 3년 1개월 2일 만에 6 · 25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