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에는 오동 유적 외에도 같은 읍내에서 성동(城東)·봉의(鳳儀)·검은개봉[黑狗峰]·금생(金生)·매지허리[沙乙峴] 등지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두만강 중류 오른쪽 연안 평야지대에 있는 오동 유적은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유적으로 수만 평에 달한다. 유물포함층은 선사시대층에서 역사시대층까지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의 존재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알려져 왔으나 정식발굴은 1954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955년에 2차 발굴이 실시되었다. 약 70여 일 동안에 400㎡ 범위로 실시된 두 차례의 발굴 결과, 6기의 집터[住居址]와 작업장이 발견되었고, 유물은 토기·석기·골각기·인골(人骨) 등 5,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집터는 모두 장방형이며,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노지(爐址)·석기제작장이 확인되었다. 벽재(壁材)로 쓰인 갈대와 싸리나무로 엮은 진흙덩이가 발견되었다. 집터의 크기는 확인된 것의 경우, 5.8m×4.1m, 5.2m×4.5m, 9.6m×4.5m, 8.4m×6.5m이다.
출토유물은 흑요석기(黑曜石器)·돌도끼[石斧]·돌끌[石鑿]·공이[敲石]·반달돌칼[半月石刀]·돌가락바퀴[石製紡錘車]·숫돌[砥石]·골검(骨劍)·뼈살촉[骨鏃]·골제시문구(骨製施文具)·뿔괭이·치아제장식품(齒牙制裝飾品) 등의 석기·골각기와 다량의 토기류이다.
특히, 토기는 갈색토기·갈색간토기[褐色磨硏土器]·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乳頭把手土器] 등 다양하다. 갈색간토기→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의 순서로 시기의 차이를 보인다.
이 밖에 주거지 안에서 불에 탄 사지골(四肢骨)·지골(指骨)·치아 등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또한 표토층에서는 주조한 투겁도끼[鑄造銎斧]가 채집되었다.
이 유적은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기·주거지·석기 등의 형식으로 보아, 서기전 6세기∼서기전 4세기에 걸치는 장기간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성격을 띠며, 이어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