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한림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해 유적의 존재와 성격을 확인하였고, 다시 1995년에 택지조성에 앞서서 구제 발굴을 실시하였다.
유적의 원래 범위는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보이나 1987년에 춘천컨트리클럽을 조성하면서 많이 파괴되었다. 발굴 결과, 약 1,670평의 산비탈에서 파괴된 구조불명의 유구가 4곳에서 확인되었으며, 이 안에서 토기와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덧띠토기, 표면을 간 적색토기[赤色磨硏土器], 표면을 간 흑색토기[黑色磨硏土器] 등의 토기와 유구석부[有溝石斧: 홈자귀], 석창, 석촉, 반달돌칼 등의 석기, 방추차, 어망추 등 다양하다. 유구석부와 반월형석도가 석창과 어망추와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볼 때, 이 곳의 점토대토기인들은 밭농사와 담수어로를 병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점토대토기, 받침달린 토기[臺足土器], 쇠뿔모양 손잡이가 달린 토기[牛角形把手附土器], 목긴 흑색토기[黑陶長頸壺] 등의 독특한 토기와 석기는 이 유적이 경기도 구리시 수석동[옛이름: 경기도 남양주군 수석리] 유적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 유적과 같이 약 서기전 5세기 이후에 출현해 기원 전후까지 존속한 덧띠토기문화에 속함을 보여준다.
이 유적의 발굴로 한강유역에 확산된 덧띠토기문화의 전파경로와 생활상에 대한 설명에 진전이 이루어졌다. 즉 아차산, 응봉, 망우동 등의 유적에서 나타나듯이, 지금의 서울권인 한강 하류에 정착한 덧띠토기인들이 한강을 교통로로 활용해 북한강의 중간 지점인 춘천 일대에 정착하고 북한강의 최상류인 양구해안까지 진출한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주로 산비탈이나 깊은 골짜기에 정착한 점으로 미루어 순수한 정착농경집단이라기보다는 지금의 화전민과 같이 이동생활을 겸했던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춘천지역에서는 이 유적 외에 중도(中島)와 온의동(溫依洞)에서도 덧띠토기편이 발견되었다. 태백산맥을 넘어선 강원도의 영동지방에서도 동해시 구호동과 양양 강선리에서 덧띠토기조각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한강 하류에서 최상류로 확산된 덧띠토기인들이 영동지방까지도 교통로를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