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대는 석회암지대로서 유적이 발견된 곳은 남한강에 합류하는 작은 하천변의 완만한 구릉지대이다.
유적은 현 지표로부터 1.3m 아래에서 굴토공사 중 우연히 드러났다. 이미 공사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원형 그대로의 석판들이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하였다. 주위에서는 부장품으로 보이는 유물이 수습되었다.
돌널〔石棺〕은 두께 6㎝ 가량의 혈암판석(頁岩板石) 4매로 네 벽을 짜맞춘 상자형돌널〔箱形石棺〕로 장축을 동서로 두고 있다.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남북의 두 긴 벽은 길이 약 1.2m, 높이 0.5m이다. 동서의 두 짧은 벽은 한 변의 길이가 약 0.5m인 정사각형에 가깝다. 굽혀묻기〔屈葬〕로 시신을 매장한 듯하다.
바닥에는 2·3매의 판석을 깔았는데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뚜껑돌〔蓋石〕로는 길이 2m, 너비 1.1m 규모의 1매의 판석을 이용해 돌널 상부를 탁자형으로 덮고 있었다. 한편, 돌널 주위에서는 뚜껑돌 위에 쌓여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괴석(塊石)들이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돌널 내부에 차 있던 흙 속에서 돌살촉〔石鏃,〕·패옥(貝玉)·인골조각이 채집되었다.
돌살촉은 모두 13점으로, 점판암(粘板岩)을 재료로 해 전면을 정교하게 간 것이다.
형식은 화살대에 꽂기 위한 뿌리가 달린 슴베식〔有莖式〕과, 뿌리가 없고 밑부분 양쪽을 새의 날개모양으로 길고 뾰족하게 만든 슴베 없는 미늘식〔無莖逆刺式〕으로 구분된다. 두 석촉의 혼합형식인 슴베미늘식〔有莖逆刺式〕도 1점 발견되었다.
1슴베식은 모두 8점으로, 촉신단면(鏃身斷面)이 마름모꼴이고 전체모양은 버들잎형〔柳葉形〕이다. 슴베없는 식은 앞의 버들잎형슴베촉의 양면을 깎아 없애 촉신 상부에만 마름모꼴의 단면이 남고 그 아랫부분은 편평납작한 육각형의 단면을 지닌 것이다.
모두 촉신 밑부분이 움푹 패어 만입부(彎入部)를 이루고 새날개모양의 역자(逆刺)를 형성하고 있다. 이 만입부가 역U자형인 것과 역U자형의 만입부 중앙에 조그만 돌기가 달린 것의 두 형식으로 구분된다. 수량은 전자가 1점, 후자가 2점이다.
슴베미늘식 1점은 촉신의 형태가 위의 역자식 돌살촉과 동일하다. 그러나 만입부 중앙에 편평납작한 촉신이 그대로 연장되어 뿌리를 형성하여 돌기의 구실을 보다 강조한 것이다.
소패옥(小貝玉)은 지름 2㎜ 미만의 백색유공평옥(白色有孔平玉)으로 완형은 1점뿐이다. 그러나 파편이 발견되는 점으로 볼 때, 원래는 여러 개를 줄에 꿰어 목걸이 등의 장신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골은 늑골과 대퇴골의 파편으로 골격의 크기 및 형태의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돌살촉·장신옥의 부장품으로 미루어 성인남자로 추정된다.
이 유적과 같이 네 벽을 각각 1매 판석으로 축조한 돌널무덤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돌살촉·옥제품·인골뿐만 아니라 간돌검〔磨製石劍〕·청동기·토기가 출토되었다.
단양안동리석관묘의 출토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돌널무덤의 연대는 청동기시대의 상한연대인 서기전 700년을 크게 상회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돌널무덤은 그 뒤 수 매의 판석으로 벽을 쌓는 돌덧널무덤〔石槨墓〕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방식 고인돌의 하부구조로도 이용되었으며, 삼국시대 고분기의 영남지방 돌덧널무덤으로까지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