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춘 ()

윤봉춘
윤봉춘
영화
인물
해방 이후 「윤봉길의사」, 「3, 1혁명기」, 「유관순」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배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75년
출생지
함경북도 회령
관련 사건
태극기사건
정의
해방 이후 「윤봉길의사」, 「3, 1혁명기」, 「유관순」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배우.
개설

함경북도 회령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회령보통학교를 나와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는데, 이때 이 학교로 편입해 온 나운규(羅雲奎)를 만나게 되었다. 몇 해 뒤 나운규는 항일사건으로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갔고, 윤봉춘은 태극기사건으로 청진형무소로 수감되었다.

그 뒤 윤봉춘이 북간도 명동중학(明東中學)에 입학하였을 때 여기에서 또다시 나운규와 재회하였다. 그가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운규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운규가 그의 작품 <들쥐>(1929)에 윤봉춘을 연기자로 데뷔시켰기 때문이다.

<잘있거라>(1927)·<옥녀 玉女>(1928)·<사랑을 찾아서>(1928)·<사나이>(1928)·<벙어리 삼룡(三龍)>(1929) 등의 나운규의 영화에 계속 출연함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자리를 굳혔고, 그 뒤에도 이구영(李龜永)의 <승방비곡 僧房悲曲>(1930), 그리고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 五夢女>(1937)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연기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1930년에는 <도적놈>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큰무덤>(1931)·<도생록 圖生錄>(1938)·<신개지 新開地>(1942) 등을 일제하에서 만들었는데, 그 작품들에는 그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자유사상이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제의 어용영화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朝鮮映畫人協會)의 가입을 거부하고 낙향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영화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1945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에 20여 편에 가까운 작품을 연출하였다.

광복 직후 1940년대 후반의 작품들은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광복영화(光復映畫)’라고 할 수 있는데, <윤봉길의사 尹奉吉義士>(1947)·<3·1혁명기 三一革命記>(1947)·<유관순 柳寬順>(1948)·<백범국민장실기 白凡國民葬實記>(1949)·<애국자의 아들>(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1960년대에는 민족의식을 담은 사극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녀별>(1956)·<논개 論介>(1956)·<한말풍운 韓末風雲>과 <민충정공 閔忠正公>(1959)·<황진이(黃眞伊)의 일생>(1961)·<여인천하 女人天下>(1962)·<애정삼백년>(1963)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고향의 노래>(1954)·<다정도 병이런가>(1957)·<영원한 내사랑>(1958)·<승방비곡>(1958)·<인생대학 일년생>(1959) 등은 당시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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