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청호동대동강 강안(江岸)의 충적평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본래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임원방의 지역으로서 푸른 호수와 같은 대동강 기슭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호동이라 한다. 유적의 뒤편에는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이 있고 강 건너에는 미림리의 기름진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1932년 일본인 가사하라(笠原烏丸)에 의해 조사되었다.
유물 산포지역은 동서 270m, 남북 90m에 이르고 있다. 포함층은 산포지역의 중앙부 동서 90m, 남북 27m의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중앙부의 포함층에 너비 1.8m, 길이 2.7m의 구덩이를 파서 조사하였다. 표토층(18㎝) 밑에서 4개의 문화층(각 18㎝의 두께)이 확인되었고, 각 층에서는 같은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어 단일시기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맨 아래층에서 사방 1.8m 규모의 방형 집터 1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바닥에는 편평한 돌을 깔았다. 중앙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자리〔爐址〕가 1개 있었고, 그 옆에서 빗살무늬토기 1개체분이 부서진 채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집터는 이른바 돌깐집터〔敷石住居址〕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유적 외에 강화도 삼거리, 강원도 춘성군 내평리에서 각각 1기씩 조사된 바 있는 희귀한 형식이다. 그러나 일본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발견된 예가 많이 있다.
발굴 구덩이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조각 939점, 그물추〔漁網錘〕122점, 타제석부 8점, 사슴이빨 2개와 소량의 목탄이 채집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형식의 토기로, 바닥이 뾰족한 포탄 모양이다. 토기 겉면은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초기의 빗살무늬토기는 겉면을 아가리, 몸통, 바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무늬로 장식하는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3,500년 무렵 한반도 전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났는데, 이전의 덧무늬토기와 달리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 부르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대표적인 유적은 함북 웅기 굴포리, 평북 의주 미송리, 평양 남경, 봉산 지탑리, 서울 암사동, 광주 미사리, 양양 오산리, 김해 수가리, 부산 동삼동 등 주로 바닷가나 큰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평양 청호동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모두 둥근 바닥을 가지고 있는 장란형(長卵型)으로 기벽(器壁)이 1.5㎝를 넘는 두꺼운 것에서부터 3㎜의 얇은 것까지 다양하다. 두꺼운 것은 바탕흙에 모래와 운모(雲母)가 섞여 있으나 얇은 것은 모래가 전혀 없는 점토로 되어 있다. 아가리는 약간 외반한 것과 내만한 것도 있다.
토기 외면에는 손톱무늬〔爪文〕가 1줄 내지 2줄씩 간단히 시문된 것, 어골문(魚骨文)이 아가리에서 바닥까지 전면에 시문된 것, 융기대문(隆起帶文)이 일렬로 시문된 것 등이 있다. 이 중에도 어골문이 전면에 시문된 것이 668편으로 전체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이 유적의 주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융기대문을 시문한 토기는 바탕흙이 곱고 기벽이 얇으며, 토기 외면을 마연한 외에 내벽을 빗으로 끊어 정면한 것도 있다.
토기손잡이로는 꼭지형 6점, 고리형 6점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에 고리형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것은 부산의 동삼동 유적에서, 꼭지형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것은 웅기의 서포항 유적에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