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혜산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혜산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북동부에 있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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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함경남도 북동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함경북도 무산군, 서남쪽은 삼수군, 남쪽은 갑산군, 북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 만주 지방의 장백현(長白縣)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8°04′∼128°47′, 북위 41°07°∼42°02′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2,325㎢, 인구 11만 1759명(1943년 현재)이다. 1개 읍 5개 면 9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혜산읍 혜산리이다.

자연환경

대부분의 지역은 용암대지인 개마고원(蓋馬高原)의 북부를 차지하며, 동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내려 함경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악 고원 지대이다.

동쪽은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아무산(阿武山, 1,803m)·백사봉(白沙峰, 2,099m), 북쪽은 병사봉(兵使峰, 2,744m)·소백산(小白山, 2,174m) 등의 높은 산지가 중첩되었으며, 허항령(虛項嶺, 1,401m)·최가령(崔哥嶺, 1,572m) 등의 안부가 발달되었다.

또한, 이 산맥에서 서남쪽 갑산군계로 지맥이 뻗어 내려 활기봉(活基峰, 2,003m)·원봉(圓峰, 1,901m) 등이 솟았으며, 지형은 대체로 서북쪽 압록강으로 완경사를 이룬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은 군의 서북부를 남류하다가 가림천(佳林川)·운룡천(雲龍川)·허천강(虛川江) 등의 여러 지류를 합친다.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하여 주요 생산 지대와 거주지가 되고 있으며, 특히 혜산진 부근에는 비교적 넓은 범람원이 발달되었다.

기후는 고위도에 위치할 뿐 아니라, 고원 지대를 이루어 매우 추운 지역이다. 우리 나라에서 기온이 가장 낮은 곳으로 겨울은 혹한이며, 특히 고지대인 보천면 포태산 부근은 한여름에도 밤에는 난로가 필요할 정도로 기온의 일교차·연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2℃, 1월 평균 기온 -19℃, 8월 평균 기온 18℃, 연 강수량 520㎜이다.

역사

[고 대]

이 지역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발해가 건국되면서부터는 그 영역에 들어 솔빈부(率賓府)에 속하였다.

[고 려]

고려 시대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하였고, 금(金)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휼품로(恤品路)에 속한 도통소(都統所)로 되었다가 1258년(고종 45)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면서 원나라의 영역에 들게 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 반원 정책의 일환으로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하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진출함에 따라 1391년(공양왕 3)에 갑산 지역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설치되고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에 갑주만호부를 갑산군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혜산군 지역은 갑산군에 속하여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갑산군의 관방요해(關防要害)로 혜산구자(惠山口子)·가사동구자(家舍洞口子)·봉천대(奉天臺) 등이 있다고 하여 혜산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뒤 혜산진(惠山鎭)이 설치되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혜산진은 갑산도호부로부터 북쪽으로 95리 떨어져 있었다. 둘레 2,320척, 높이 9척의 석축이 있었으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설치되어 첨절제사 1인이 파견되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갑산부의 14개 방리 가운데 하나로서 혜산사(惠山社)라 하였고, 호구는 민호 188호, 인구 784명(남자 405명, 여자 379명)이었다.

[근 대]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갑산읍지』에도 혜산사로 나타나 있으나, 1894년의 『갑산읍지』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뒤 1934년 3월에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갑산군 보혜면(普惠面)이 혜산읍과 보천면으로 분리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길주에서 혜산에 이르는 혜산선(또는 길혜선, 경편철도)이 개통되어 이 지방의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1942년 4월에는 혜산읍에 갑산군 운흥면(雲興面)·봉두면(鳳頭面)·보천면(普天面)·대진면(大鎭面)과 삼수군 별동면(別東面)이 편입, 혜산군으로 승격되고 1개 읍, 5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 때 백두산이 혜산군에 포함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한편, 혜산군이 독립하게 된 것은 이곳이 백두산 일대의 풍부한 임산물이 집산하는 목재 도시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07년에 이미 영림창(營林廠)을 설치하였으며, 이후 수풍(水豐)댐을 건설하면서 신의주의 영림서를 폐지하고 혜산에 백두영림서(白頭營林署)를 설치할 정도로 혜산은 목재 도시로 중요시되었다.

1943년 현재 호수 1만 9180호, 인구 11만 1759명(남자 5만 8272명, 여자 5만 3487명)으로 갑산군보다 배 이상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유물·유적

군내에는 보천보(普天堡)를 비롯하여 혜산읍에서 남동쪽 12㎞ 지점에 둘레 444.5m, 높이 2.7m의 석축으로 조성한 운총보(雲寵堡)와 둘레 848.4m, 높이 2.4m의 허천강구행성(虛川江口行城)이 있다.

그리고 읍성인 혜산진성이 둘레 606m, 높이 2.7m의 석축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성에서 서북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성안에는 우물 1개가 있다. 지금도 괘궁정(掛弓亭)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혜산진의 동남방 2㎞ 지점에는 국사당(國師堂)과 제단령(祭壇嶺)이 있고, 운흥면에는 백운사(白雲寺)가 있다.

교육·문화

전통적인 교육 정신의 뿌리는 갑산군의 영향을 받아왔다.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갑산향교(甲山鄕校)를 중심으로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지방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학문을 전수하였다.

특히, 1921년 갑산장학회가 조직될 정도로 군민의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며, 1933년 조사에 의하면 60여 개의 서당과 1,200여 명의 학동이 있었다고 한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해관(海觀)·육영(育英)·창흥(彰興)·일신(日新)·보성(普成) 등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천도교가 가장 활발하여 혜산교구까지 설치되었으며, 기독교의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혜산선이 개통되면서 체육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특히 축구와 배구의 열기가 높았다. 종합 운동장인 괘궁정이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체육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산업·교통

산악 고원 지대이기 때문에 경작지로 이용할 만한 평지도 협소하며, 기후도 한랭하다. 따라서, 작물의 성장 기간에 제약을 받아 농업적 기반은 미약한 편이다.

그러나 토양은 현무암이 분해된 레구르 토양으로서 비옥하며, 여름철의 기온이 높고 우량이 풍부한 짧은 성장 기간을 이용하여 내한성 작물(耐寒性作物)이 재배된다. 또한, 일부 산악 지대에서는 화전 형태의 농업도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조·귀리·피 등이며, 특산물로는 아마·양귀비·홉 등이 있다. 특히, 이 지역의 농업 조건이 아마·양귀비 등의 경작에 적당하여 보천면 보천보에 농사 시험장을 설치하여 이들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며, 전량이 군수품으로 제공된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축우가 이루어지며, 일본의 남면북양정책(南棉北羊政策)으로 양의 사육도 활발하다.

임업은 이 지역의 최대 산업으로서 백두산을 정점으로 백두수해(白頭樹海)를 이룬다. 특히, 대진면·보천면·운흥면·봉두면은 광활한 면적의 임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문비나무·분비나무·자작나무·낙엽송·전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일본은 삼림철도를 부설하고 원목을 대량으로 반출하였는데, 이들 지역의 벌채량은 전국 제1위이다. 벌채된 목재는 혜산으로 집산되며, 대부분 압록강의 수운과 혜산선을 이용하여 만포·신의주·길주·성진 등지로 수송된다.

공업은 제지·제재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광업은 운흥면 일건리운흥광산(雲興鑛山)에서 마그네사이트가 생산된다.

교통은 혜산진을 중심으로 철도와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혜산선이 군의 중남부를 통과하며, 위연·대오천·심포·보안·남중·영하 등의 여러 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 철도는 삼림 및 지하자원의 개발에 큰 구실을 한다.

도로는 혜산진∼의주 간, 혜산진∼무산간, 성진∼혜산진 간의 2등도로, 혜산진∼길주군 합수 간, 혜산진∼무산군 간, 혜산진∼삼수군 신갈파진 간의 3등도로가 통과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특히, 마천령산맥을 통과할 때에는 허항령·최가령 등의 안부가 교통로로 이용된다.

수운은 압록강을 이용하여 신갈파진·만포·신의주 등으로 목재 운반이 이루어지며, 혜산진과 만주 장백현 사이의 압록강 위에 인도교인 혜장교(惠長橋)가 건설되었다. 혜장교는 목조로 가설되었으며, 규모는 작지만 서울의 한강대교와 비슷하다.

중화민국 당시는 양국 간의 교통이 거의 없었으며, 극히 제한된 사람에 한하여 도선을 이용한 교통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만주국이 건립된 뒤에 이 다리가 가설되어 내왕이 자유로워지고, 특히 장백 방면으로 집단 이주한 동포들의 내왕이 더욱 빈번하였다.

혜산읍의 지정 시장일이면 우리 동포 및 만주인의 내왕이 격증하여 일대 가관을 이룬다. 주요 관광지로는 산악 경관이 뛰어난 백두산이 있다.

읍·면

[혜산읍惠山邑]

군의 서부에 있는 읍. 인구 1만 9767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혜산리이다. 본래 갑산군 보혜면 지역으로서, 1932년 혜산면과 보천면으로 분리되었으며, 1934년 혜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42년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산간 고원 분지로 대부분의 지역이 평탄하다. 압록강은 읍의 북부를 남서류하며, 풍산군에서 발원한 허천강은 별동면에서 운룡천과 합류하여 읍의 서남부를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혜산진부근에는 비교적 넓은 범람원이 발달하고 있으며, 기후와 지형적인 영향으로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조·피 등이며, 특산물로는 아마·양귀비 등이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면양 사육이 이루어지며, 그에 따르는 가공 교역도 활발하다.

임업은 이 지역 최대 산업으로서, 벌채된 목재는 뗏목으로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신의주까지 운반되었으나, 수풍댐 건설 이후 혜산선을 이용하여 원목 및 제재목이 반출되고 있다.

특히, 혜산진은 압록강변의 목재 운반 및 제재뿐 아니라 만주와 혜장교로 연결되어 교통 및 국방 보안상 중요한 지역이다.

교통은 혜산선이 통과하며, 혜산진역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혜산진∼무산 간, 성진∼혜산진 간, 혜산진∼의주 간의 2등도로, 혜산진∼삼수군 신갈파진 간의 3등도로 등이 통과하며, 별동면·운흥면·보천면·삼수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괘궁정,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국사당, 봄·가을에 백두산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령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혜산(惠山)·요동(要洞)·춘동(春洞)·석덕(石德)·강구(江口)·연평(囦坪)·여달(呂達)·위연포(渭淵浦)·중(中)·송봉(松峯) 등 10개 이가 있다.

[대진면大鎭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인구 1만 395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진평리이다. 본래 갑산군 보천면 지역으로서, 1942년 보천면의 동부 지역이 대진면으로 분리되면서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마천령산맥이 동부로 뻗어내려 도계를 이루며, 대부분의 지역이 험준하다. 동쪽은 아무산·최가령, 남쪽은 황봉(黃峰, 2,047m)·망남산(望南山, 1,880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으며, 지형적으로 동쪽은 높고 남서쪽은 낮은 경사면을 이룬다.

아무산과 최가령 등에서 발원한 가림천이 면의 중북부를 서남류하다가 보천면 보천보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생활 무대가 되고 있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화전형태의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조·피 등이며, 특산물로는 아마·양귀비 등이 있다. 임업은 대부분의 지역이 원시림의 수해를 이루어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목재는 뗏목으로 가림천과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신의주까지 운반되었으나, 수풍댐건설 이후 혜산선을 이용하여 원목 및 제재목이 반출되었다.

교통은 혜산진∼무산군간의 3등도로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보천면·운흥면·무산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대진평(大鎭坪)·여수(麗水)·대평(大坪)·대흥(大興)·보흥(保興) 등 5개 이가 있다.

[별동면別東面]

군의 서남단에 있는 면. 인구 6,51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통목리이다. 본래 갑산군 지역으로서, 1896년 삼수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42년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남부에는 운주봉(雲住峰, 1,586m)이 솟아 있으며, 동부 갑산군계는 500m 이상의 산지를 이룬다.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허천강 하류의 평탄한 혜산읍과 연속된 평야 지대이다. 허천강은 면의 중앙을 북류하다가 운룡천과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기후와 지형적인 영향으로 산간 평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귀리·옥수수 등이며, 특산물로는 대마·아마·양귀비 등이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면양 사육이 이루어지며, 특히 양귀비·아마·면양 등은 군수품으로 제공되었다.

교통은 혜산진∼의주 간의 2등도로가 이 면의 서부를, 성진∼혜산진 간의 2등도로가 면의 동부를 통과하며, 혜산읍·운흥면·삼수군·갑산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통목(桶木)·상발(上發)·내동(內洞)·상어(相於)·효장(孝長)·선소(船所)·양문(養文)·번포(蕃浦)·창포(菖蒲)·하면(下面)·부변(桴邊)·광생(光生)·동동(銅洞)·보파(寶坡)·회사(回沙)·장동(長洞)·장수(長壽)·신거(新巨)·천석(千石)·장강(長江)·안계(安溪)·동하(東下)·흘립(屹立)·동중(東中)·삼흥(三興)·상초평(上草坪)·대동(大洞) 등 27개 이가 있다.

[보천면普天面]

군의 북단에 있는 면. 인구 2만 55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보전리이다. 본래 갑산군 보혜면 지역으로서 1934년 혜산읍과 보천면으로 분리되었으며, 1942년 이 군이 생기면서 동부 지역이 대진면으로 분리되고 서부 지역만으로 축소되어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대체로 산악 고원 지대이며, 서남부는 압록강 및 지류의 합류 지점으로 연안평야를 이룬다. 동쪽은 북포태산·남포태산·장군봉(將軍峰, 2,108m), 북쪽은 소백산·간백산(間白山, 2,164m)·병사봉·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등의 험한 산이 중첩되어 있다.

압록강이 면의 서부를 남류하며, 가림천이 면의 남부를 서류하다가 보천보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하천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생활무대가 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조·귀리 등이며, 특산물로는 아마·양귀비 등이 있다. 특히, 보천보에 농사 시험장을 설치하여 아마·양귀비 등의 재배를 장려하였으며 군수품으로 제공되었다. 임업은 대부분의 지역이 원시림의 수해를 이루어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벌채된 목재는 뗏목으로 압록강과 그 지류들의 수운을 이용하여 신의주까지 운반되었으나, 수풍댐 건설 이후 혜산선을 이용하여 원목 및 제재목이 반출되고 있다.

교통은 혜산진∼무산 간의 2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혜산진∼무산군 간의 3등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혜산읍·운흥면·대진면·무산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백두산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담비, 백두산의 사슴·곰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가 있다.

보전(保田)·화전(樺田)·가림(佳林)·산위(山衛)·농산(農山)·포태(胞胎)·보태(寶泰)·녹수(綠水)·통남(通南)·축전(杻田)·신흥(新興)·의화(儀化)·내곡(內曲) 등 13개 이가 있다.

[봉두면鳳頭面]

군의 동남단에 있는 면. 인구 1만 911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두리이다. 본래 갑산군 지역으로서, 1942년 운흥면의 남부 지역이 봉두면으로 분리되면서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마천령산맥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 동쪽은 설령봉(雪嶺峰, 1,836m)·대각봉(大角峰, 2,121m), 서쪽은 원봉, 남쪽은 활기봉, 중앙에는 장덕봉(長德峰, 1,628m)·고덕산(高德山, 1,553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으며, 지형적으로 동쪽은 높고 서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대각봉과 설령봉 등에서 발원한 운룡천이 면의 중앙을 서류하다가 별동면에서 허천강과 합류한다.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생활 무대가 되고 있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화전 형태의 원시적인 경작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로는 감자·귀리·옥수수 등이 있으며, 특산물로는 대마가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의 사육이 활발하며, 사슴·곰·산돼지 등의 야생동물도 많다.

임업은 대부분의 지역이 원시림의 수해를 이루어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벌채된 목재는 뗏목으로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신의주까지 운반되었으나, 수풍댐 건설 이후 혜산선을 이용하여 원목 및 제재목이 반출되었다.

교통은 혜산선이 통과하며, 보안·봉두·생장·남중·영하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혜산진∼길주군 합수 간의 3등도로가 면의 중북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혜산읍·별동면·운흥면·갑산군·길주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봉두(鳳頭)·심포(深浦)·백암(白巖)·별남(別南)·보안소(甫安所)·용천(龍川)·장항(獐項)·생장(生長)·동흥(東興)·운령(雲嶺)·용암(龍巖)·신덕(新德) 등 12개 이가 있다.

[운흥면雲興面]

군의 중부에 있는 면. 인구 2만 286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오시리이다. 본래 갑산군 지역으로서, 1942년 남부 지역이 봉두면으로 분리되고, 북부 지역만으로 축소되어 신설된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동쪽은 황봉·백사봉, 남쪽은 관두봉(冠頭峰, 2,136m)·희상봉(稀喪峰, 1,585m), 북쪽은 망남산·구계물봉(九鷄物峰, 1,269m) 등의 험한 산지가 솟아 있으며, 지형적으로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경사면을 이룬다.

오시천(五是川)이 면의 중앙을 서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되며, 운룡천이 면의 서남부를 서류하다가 허천강과 합류한다. 특히, 서부는 양대 하천 유역으로서 대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생활 무대가 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귀리·조 등이다. 임업은 동부 산지를 중심으로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원목·제재목 등의 생산이 활발하다. 벌채된 목재는 뗏목으로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신의주까지 운반되었으나, 수풍댐 건설 이후 혜산선을 이용하여 원목 및 제재목이 반출되고 있다. 광업은 일건리의 운흥광산에서 마그네사이트가 생산된다.

교통은 혜산선이 통과하며, 대오천역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성진∼혜산진 간의 2등도로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혜산읍·별동면·봉두면·갑산군 등과 연결되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대오시(大五是)·모정(毛亭)·운룡(雲龍)·중봉(中峰)·호동(芦洞)·신복(新福)·송암(松巖)·대문(大門)·봉서(鳳棲)·중평(仲坪)·하장성(下長城)·상장성(上長城)·일건(日建)·대중(大中)·대하(大下)·속신(束薪)·남산(南山)·상산양천(上山羊川)·하산양천(下山羊川)·오산(五山)·오시천(五是川)·장포(長浦)·검산(劍山)·신흥(新興)·산당(山堂)·대전평(大田坪)·대상(大上)·옹동(甕洞) 등 28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이전 혜산군의 혜산읍·봉두면·운흥면·별동면 일부로 혜산군이 되었다. 1954년 10월 양강도가 신설되면서 혜산군 혜산읍 춘동리·영흥리·중리와 위연포노동자구를 병합하여 혜산시로 승격되었다.

1961년 3월 운흥군 오시천리·노중리·운총리·신장리·장안리가 시에 편입되고, 혜산동과 혜흥동 일부가 분리·병합되어 혜강동이 다시 신설되었다. 또한, 혜화동 일부가 분리되어 혜흥동에, 춘동리 일부가 분리되어 혜신동에 각각 합쳐졌다.

혜명동 일부와 영흥리 일부가 분리·병합되어 연봉동이 신설되었으며, 연두동 일부가 영흥리에 편입되고 영흥리가 영흥동으로 바뀌었다. 위연동 일부가 연두동에, 중리 일부가 연풍동에, 연풍동 일부가 중리에 각각 합쳐지고 중리가 송봉동으로 바뀌었다.

혜화동 일부가 분리되어 춘동리에 편입되고, 춘동리 일부와 삼수군 중운리 일부가 분리, 병합되어 강구동이 신설되고, 춘동리가 춘동으로 바뀌었다.

1965년 1월 혜산동 일부가 분리되어 신흥동, 연두동 일부와 위연동 일부가 분리되어 강안동, 춘동 일부와 혜화동 일부가 각각 분리되어 혜탄동, 혜명읍 일부와 연봉동 일부 및 성후동 일부가 각각 분리되어 해명동, 연풍동 일부가 위연동에 각각 합쳐졌다. 1973년 춘동 일부가 분리되어 마산동이 신설되고, 1982년 검산동이 신설되었다.→혜산시

참고문헌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갑산읍지』
『함경남도교육일반』(함경남도, 1920∼1930)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88)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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