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

로스엔젤레스 한인상가
로스엔젤레스 한인상가
사회구조
개념
외국에서 영구적이거나 오랜 기간 살 의도로 국가의 경계를 넘는 인구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민은 외국에서 영구적이거나 오랜 기간 살 의도로 국가의 경계를 넘는 인구이동이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이민의 형태가 자리잡은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현대 이민의 특징은 경제적 선진국들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펴면서 이루어진 노동자 중심의 이민이다. 우리나라도 경제성장과 함께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이민 송출국에서 이민 수용국으로 변모했다. 결혼이민자 비중이 크다는 점이 특징인데, 2010년 현재 외국인 거주자가 전체 인구의 2.6%에 달할 정도로 급증하여 다문화사회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의
외국에서 영구적이거나 오랜 기간 살 의도로 국가의 경계를 넘는 인구이동.
개설

이민의 유형

‘이민’과 ‘이주’는 종종 혼용되는데 둘 사이에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이민이 국가의 경계를 넘는 인구 이동인 국제이주인 반면 이주는 이민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국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단기 체류나 영구 정착을 위해 거주지를 변경하는 모든 형태의 이동을 가리킨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은 3개월 이상 삶의 근거지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을 이민으로 정의한다.

이민은 이동의 방향, 동기, 시간, 규모 등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된다. 방향과 관련해서 국내로 들어오는 이민을 이입(移入, immigration), 국외로 나가는 이민을 이출(移出, emigration)이라고 부른다. 동기에 따라서는 자발적 이민과 비자발적 이민으로 구분된다. 자발적 이민은 기원국과 거주국 간의 취업, 교육, 생활수준 등의 차이로 인해 보다 좋은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주근로자, 결혼이민자, 해외 유학생, 은퇴이민자 등이 자발적 이민에 해당한다. 반면 비자발적 이민은 자연재해, 전쟁, 탄압, 납치 등의 이유로 강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떠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난민, 유민, 인신매매 피해자 등이 비자발적 이민에 해당한다. 리치몬드(Richmond, 1988)는 자발적 이민과 비자발적 이민으로 구분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순응적(reactive) 이민과 적극적(proactive) 이민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다. 순응적 이민자에는 난민, 무국적자, 노예, 강제노역자 등이 있고, 적극적 이민자에는 은퇴이주자, 통행자, 귀환자, 가족 재결합자, 일상적 여행자 등이 있다.

시간에 따라서 이민은 일시적 이민과 영구적 이민으로 구분된다. 일시적 이민은 단기간에 외국에 체류했다가 귀국할 목적이 있는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으로, 이에는 단기 계약 근로자, 계절 노동자, 순환 이주 노동자, 해외 유학생 등이 있다. 반면 영구적 이민은 처음부터 영구 정착을 목적으로 출국하는 경우로, 이에는 결혼 이민자, 투자 이민자, 가족결합 이민자 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단기 체류를 목적으로 출국했다가 결국 현지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규모에 따라서 이민은 개인이민과 대량․집단이민으로 구분된다. 개인이민은 취업, 유학, 가족결합 등의 이유로 개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이동이고, 대량․집단이민은 자연재해, 전쟁, 탄압 등의 이유로 민족 또는 국민의 일부가 집단 수준에서 이동하는 것이다. 대량 · 집단이주의 대표적인 예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면서 발생한 인구이동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면서 72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거의 동수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한민족의 경우에도 대량 · 집단이주의 아픈 경험이 있다. 1937년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한인이 일본의 첩자역할을 할 것이라는 군사적 우려와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지역을 이들의 노동력에 의해 개간한다는 경제적 목적 하에 17만 1781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 국가들로 강제 이주시켰다. 현재 52만 명에 달하는 독립국가연합 고려인의 대부분은 1937년 강제 이주된 이민 1, 2세의 후손이다.

이민의 영향

이민은 인구이동을 통해 한 개인과 그의 가족, 지역사회, 기원국과 거주국, 세계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이민연구에서는 이민의 규모와 특성, 동향뿐만 아니라 이민이 개인과 사회, 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과 주제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이민에 대한 기존 연구의 상당 부분은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인권, 디아스포라, 초국가주의, 다문화 등의 관점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개발의 측면에서 이민은 이주 노동, 송금, 두뇌 유출 또는 두뇌 순환의 방식으로 기원국과 거주국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저숙련 이주 노동자는 거주국에서 내국인이 꺼려하는 소위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자신의 모국에는 송금을 통해 가족과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한다. 유학생 및 고숙련 이주 노동자의 이주는 과거에는 두뇌 유출이라고 부정적으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귀환 또는 순환 이주가 빈번해지면서 모국과 수용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이민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주의 여성화’다. 국가 간 노동 이주의 50% 이상이 여성 이주자에 의해 이뤄지고, 남편을 따라 이동하는 ‘동반 이주자’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주체적인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하는 취업 이주자가 많아졌다. 여성의 이주 노동은 가족 구조와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 해외에서 일하는 ‘초국가적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부부간의 역할 분담과 가정내 책임의 범위가 변하고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또한 부모의 해외 이주로 본국에 남겨진 아동은 양육, 교육, 복지 등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특히 부 또는 모의 부재가 장기화될 때 부모­자녀 간의 정서적 유대가 약해지고 부모의 훈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일탈 또는 비행에 빠질 위험이 높아진다. 반면 해외에서 부모가 보내는 송금으로 자녀는 학교 교육을 받고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초국가적 양육이 자녀의 교육과 복지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연구 결과가 나온 상태라 앞으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민은 해외에 재외동포로 구성된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를 형성한다. 디아스포라는 우리말로는 민족분산(民族分散) 또는 민족이산(民族離散)으로 번역되는데, 단지 같은 민족 성원들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과정뿐만 아니라 분산한 동족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과거에는 디아스포라가 모국에서의 부정적인 요인들(빈곤, 압제, 강제 추방 등)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재외동포가 모국의 귀중한 인적자원으로 인식되어 모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외동포와 모국 간의 네트워크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해외에 나가 있는 수백만 명의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모국에서는 ‘국가적 실패’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나 이들이 송금을 보내 국가 경제에 기여하자 이제는 ‘국가의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재외동포는 단지 모국에 송금을 보내는 경제적 기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근대화시키고, 선진국의 기술, 지식, 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원조와 투자를 모국으로 유치하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최근 이민연구에서는 디아스포라 개념보다 초국가주의 개념을 사용해서 모국과 거주국 간에 형성된 쌍방향적이고 다층적인 사회‧문화 연결망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는 세계화 시대에 초국적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에 대해 주목하는 이론적 시각이다. 초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내려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구이동을 통해 이주민들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및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 기원국과 거주국에 모두 연결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초국가적 연결망을 통해 중국의 개방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조선족은 1980년 이전까지는 동북 3성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교육 수준과 소득에서 한족을 앞서는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으로 연해지역과 내륙 대도시를 중심으로 경제발전이 이뤄지면서 변방에 위치한 조선족의 경제수준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족은 1980년 이후부터 연해와 내륙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중국-한국-일본-미국 등을 연결하는 초국가적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핵가족이 분산되기도 하지만 시부모/친정 부모, 형제자매, 친척 등이 자녀 양육 및 교육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면서 초국가적 가족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면서 축적한 자본과 직업 기술을 갖고 귀국한 조선족은 중국에서 자영업자로 변신하면서 조선족이 자본주의로 전환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민은 서로 떨어져 살던 인종․민족집단들이 접촉하고, 새로운 인종․민족관계를 형성하게 만든다. 서로 분리되었던 두 인종․민족집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접촉하느냐에 따라 인종․민족관계의 성격이 달라진다. 정복과 같은 방식으로 이주집단이 토착집단을 종속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토착집단이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종․민족관계가 갈등적이고 억압적이다. 15세기 후반에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이들을 피지배 민족의 위치로 전락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인디언들은 고향에서 추방되고 ‘인디언보호지역’에 갇혀 빈민층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이민을 통해서 이주집단이 거주국에 정착하는 경우에는 수적으로나 권력에서 열세인 이주집단이 생존의 목적으로 토착집단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기 때문에 인종․민족관계는 덜 갈등적이고 억압적이다. 더욱이 이민이 자발적으로 이루어 졌을 경우에는 갈등이 미미하고 이민자들이 거주국의 사회문화에 동화하고 기존 체제에서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아시아인들이 교육과 소득에서 백인을 추월할 정도로 성장해서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로 불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아시아인 중에도 민족집단별로, 사회계층별로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고, 성공한 중상층 아시아계 미국인들도 ‘유리장벽’과 같은 차별을 경험한다.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다른 소수인종들(흑인과 히스패닉)과 비교해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고, 백인 중심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동화주의적 적응 양식을 보이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민은 그 규모와 다양성에서 더욱 확대됐고, 이로 인해 거주국의 인종 · 민족 구성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나아가 국가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들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내국인들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기피하게 되었다. 더욱이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경제활동인구가 줄면서 건설업, 제조업, 개인 서비스업 분야의 인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의료전문인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노동력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이주노동자와 전문인력을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이전 식민지(알제리, 모로코 등)로부터 이민자들을 받아들였고, 독일은 터키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으며 한국으로부터는 광산노동자와 간호사들을 계약 노동자 형태로 받아들였다. 미국과 캐나다 역시 196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로부터 중산층 출신 이민자들을 적극 받아들여 자국의 경제발전에 활용하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구 선진국의 인구 구성에서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고, 더 이상 동화주의로는 자국 내 사회통합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캐나다는 1971년에 서구 국가로는 처음으로 다문화주의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했다. 원래 의도는 퀘벡 주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분리 운동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이후 소수 인종 집단의 문화 보호와 평등한 기회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 이후 다문화주의는 미국, 호주, 유럽의 여러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이들 국가들에서 소수민족과 원주민, 소수 인종 문화 집단들의 문화적 생존과 정체성을 인정하라는 요구가 점증하면서 이를 수용하는 동시에 자유주의 정치 질서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방편으로 다문화주의가 채택되었다.

2000년대 이후 다문화주의는 서구 국가들에 비해 인종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도 확산되었다.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경제성장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경험하면서 일본, 대만, 한국은 1980년대에 들어서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게 되었고, 이를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수준 격차가 커지게 되면서 농촌 지역의 남성들이 내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어렵게 되자 외국인 신부를 초청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외국인 전문 인력, 사업가, 유학생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과거에 비교해 외국인 수와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각국 정부는 장기 체류 외국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귀화 외국인의 사회문화 적응을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문화다양성 속에서 사회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정책적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은 ‘다문화 공생’이라는 정책을 통해서 지역사회에서 생활인으로 살고 있는 외국인의 사회적응을 지원하고, 일본인과 외국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고 있다. 한국은 ‘외국인정책’과 ‘다문화가족지원정책’을 통해 외국인과 국제결혼 가족이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한국인과 외국인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환경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아직 동북아시아 국가들에서 외국인의 비율은 2~3%에 불과하고, 외국인의 상당수가 단기 체류자이기 때문에 서구 국가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민족갈등은 아직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향후 외국인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이 정주자가 되면서 자신들의 평등한 사회권과 문화권을 요구하며 기존 질서에 도전하게 될 때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민족 갈등이 재현될 가능성도 크다. 더욱이 다문화의 경험을 갖지 못했던 동북아시아 국가들에서 다수집단의 사회문화에 동화하기를 거부하는 소수민족을 얼마나 관용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동질성과 민족주의가 강한 동북아시아에서 다문화주의는 정착하기까지 매우 힘든 여정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전근대의 이주와 이민

인류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먼 조상인 직립원인(호모 에렉투스)은 지금부터 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이주했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7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기 시작했고 4만 년 전에는 호주, 아시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는 2만~1만 5천 년 전에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를 거쳐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근대 이주는 15001800년 기간에 융성했던 중상주의 시대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시기의 이주자들은 다수의 농민, 소수의 관료와 장인, 극소수의 기업가, 그리고 특수한 경우에는 죄수들로 구성됐다. 신대륙에서의 농장경제는 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농장주들은 처음에 동아시아에서 계약노동자들을 들여왔다. 그러나 이들 노동력으로는 충분치 않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15001800년 기간에 천만 명 가량의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들여왔고 이들로 인해 신대륙의 인종․민족 구성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19세기 초기에 유럽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국제이주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소외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노동자, 농민 계층들은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주했다. 1800년부터 1925년 기간에 4천 8백만 명의 유럽인들이 영국, 이탈리아,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을 떠나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 이주했다.

1914년에 시작해서 1918년에 종료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으로부터의 국제이주를 중단시켰고,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은 국제이주를 더욱 제한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국제이주가 중단되었으나 전쟁 이후에 발생한 난민, 실향민들이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했다.

위와 같은 세계적인 국제이주의 역사와 비교해서 한민족 이주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한일합방이 일어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유민(流民)으로서 당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 이주는 1902~19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 거주 일본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1905년에 한인 이주를 금지하면서 더 이상의 이주는 불가능해졌다. 1905년까지 7,226명의 이주자들이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이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사진결혼의 형태로 1,000여 명 가량의 한인 여성들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서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한국이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일제 통치시기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 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 증가했는데, 이중 약 25만 명 정도가 집단이주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호황을 맞아 한인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일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런 식으로 재일한인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한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가 패전 후 많은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만 8507명으로 급감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한국 정부가 이민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동일시기에 5,000명가량의 아동들이 전쟁고아, 혼혈아 또는 입양아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위와 같은 두 부류의 이민자들이 전후 한인 이민자의 2/3을 차지하였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생들이 학위 취득 후 고국에서 누릴 사회적 권위와 출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않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현대의 이주와 이민

세계의 이주와 이민

1960년대에 시작된 현대적 이주는 과거의 이주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때부터 국제이주는 소수의 유럽 국가들에 제한되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유럽 국가들이 주요 송출국이었으나 이때부터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개발도상국들이 대다수의 이민자들을 송출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이민 수용국이었던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의 유럽국가들이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는 전통적인 이민 송출국이었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고유가로 고속의 경제성장을 시작한 중동 산유국들이 건설 및 가사노동자들을 대량 유입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아시아 국가들로 국제이주가 확대되어 일본 외에도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부족해진 노동력을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충원하기 시작하면서 이민 수용국으로 변모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국제 이주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그 규모와 속도가 급속히 증가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다. 1960년대 중반 미국과 캐나다가 인종차별적이었던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이민자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정주 목적의 이민을 가게 되었다. 북아메리카로의 이민 외에 또 하나의 커다란 흐름은 중동 국가로의 노동 이주였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중동의 산유국들이 폭등한 유가로 벌어들인 외화로 도로와 교량과 같은 국내의 인프라를 건설하고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입했다. 적은 인구 규모로 인해 건설 현장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외국인 노동자로 충원했고 이들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이주했다. 1985년에 필리핀은 253,867명의 노동자들을 중동으로 송출했는데 이들의 규모는 전체 송출 노동자의 79%에 달했다. 한국은 120,245명의 노동자들을 송출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중동 건설 노동자로 건너갔다. 타이 역시 6만 1657명의 노동자들을 중동으로 송출했다. 중동에서의 노동 수요가 건설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그리고 남성 노동자에서 여성 노동자로 옮겨 가면서 언어 및 문화적 이유로 아랍 이주민들이 아시아인들을 대체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자국의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취업을 금지하려는 정부 차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걸프 산유국 사적 노동시장의 90% 이상이 서남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중동으로 향했던 노동 이주가 아시아로 방향을 바꾼다. 그 주된 이유는 1991년에 발발한 걸프전쟁, 중동 인프라 건설 사업의 종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제성장이었다. 그 결과 1997년에 해외로 송출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75%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25%가 중동으로 향했다. 1996년에 타이는 18만 5436명의 노동자들을 해외로 송출했는데 이들 중 87%가 아시아로, 12%는 중동으로 향했다. 이 시기에 한국은 낮은 인구 성장률과 높은 경제 성장률로 내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하기보다 외국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이주하는 노동 수입국으로 변모했다.

한국의 이주와 이민

현대적 의미의 한국의 이민은 1962년 한국 정부가 이민정책을 수립하고 정착을 목적으로 이민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면서 시작되었다. 1962년에 한국 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 국가들과 계약을 맺고 집단이민을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민정책의 주요 목표는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구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일하고 사는 동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해외이주는 1965년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성장기를 맞이하였다. 미국은 그 이전까지는 유럽계 이민자들을 선호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이민자들은 배척하였으나, 냉전시기에 인종적으로 배타적인 이민정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경제성장을 위해 비유럽계 이민자들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이민법 개정을 따라서 캐나다, 호주 등도 이민법을 개정하여 비유럽계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은 높은 인구밀도 이외에도 고실업과 저소득 때문에 밖으로 인구를 배출하려는 힘이 강했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팽창하는 의료분야와 과학기술분야에서 외국의 고학력․전문직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한인이민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이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70~80년대에는 연 3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모국에서 재외동포의 전문직․기술직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해외이민이 줄고 오히려 역이민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해외이주는 계속해서 감소추세로 흐르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등의 형태로 직장을 잃거나 고용이 불안정하게 되자 보다 안정된 일자리와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해서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에는 2만 3314명이 해외이주를 떠났지만 1995년에는 1만 5917명으로 줄고, 1997년에는 1만 2484명으로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1998년에는 해외이주자가 1만 3974명으로 증가했고, 1999년에는 1만 2655명으로 약간 감소했다가, 2000년에는 1만 5307명으로 다시 증가하였다. 또한 미국으로의 이민기회가 제한되거나 이민수속이 장기화되자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이 이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국가로 목적지가 변경되고 있다. 또한 캐나다와 멕시코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밀입국하거나 단기방문비자를 가지고 입국한 후 장기 체류하는 등의 불법체류자들이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해외이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현상이며 국내외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의해 계속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그 규모와 특성이 변해갈 것이다.

1998년 이후 해외이주의 유형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이주하는 국가가 바뀌고 있다. 1998년까지는 미국이 해외 이주국가로서 1위의 지위를 지켰지만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캐나다에게 밀리고 말았다. 2000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은 5,244명으로 전체 이주자의 34.4%를 차지하였지만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은 9,295명으로 전체 이주자의 60.6%였다. 이렇게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자수가 역전된 것은 캐나다가 자국의 경제발전과 인구성장을 위해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캐나다 정부는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의 연고 없이도 본인의 학력, 직업경험, 영어능력 등에 기초해서 이민 갈 수 있는 독립이민이나 캐나다에 사업이나 투자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사업이민, 투자이민 비자를 미국에 비교해서 보다 자유롭게 발급하였다. 캐나다 말고도 호주, 뉴질랜드 등도 독립이민, 사업 및 투자이민 등의 형태로 한인 이민자들을 유인하고 있어서 영연방 국가들로의 한국인 해외이주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2004년을 시작으로 다시 미국이 해외이주 1순위 국가로 다시 부상하여 여전히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계속될 전망이다.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변화는 이주형태가 바뀌고 있다. 종전에는 가족 초청 이주가 주된 형태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경제의 불안정과 교육 여건에 대한 불만으로 30대 중산층의 이민이 활발해지면서 사업 또는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전문직, 관리직 등에 종사하면서 중산층을 형성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주하는 주된 이유는 단지 한국에서 못살아서라기보다는 고용불안정, 지나친 경쟁, 자녀 교육, 사회복지 등 소위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여 이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1997년에 총 1만 2484명의 해외이주자 중 46%가 초청이주자였던 것이 1999년에는 총 1만 2655명의 해외 이주자 중 26%로 비율이 감소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업 또는 취업이주자는 1997년에 전체 이주자의 44%였던 것이 1999년에는 62%로 증가하였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사업 또는 취업이민자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이민자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고학력, 전문직․관리직 종사자, 중산층의 이민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 자원유출 또는 두뇌유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적응력과 경쟁력이 있는 인력이 해외에 진출하여 정착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나라의 국력이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이민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2010년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현황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재외동포의 규모는 726만 8750명으로, 남북한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지역적으로 재외동포는 중국(270만 4994명), 미국(217만 6998명), 일본(90만 4806명), 캐나다(23만 1492명), 러시아(21만 8956명), 우즈베키스탄(17만 3600명), 호주(13만 2287명), 카자흐스탄(10만 7130명), 필리핀(9만 6632명), 베트남(8만 3640명), 브라질(5만 773명), 영국(4만 6829명) 등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재외동포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4대 강국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어서 한국과 이들 국가들과의 무역, 외교, 학술, 과학기술,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중개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외국인의 증가와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한국은 이민 송출국에서 이민 수용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 외국인 근로자들의 유입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는 결혼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한국 내 외국인의 규모는 빠르게 증가했다. 법무부의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2007년 8월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단기체류자 포함)의 수가 처음으로 1백만 명을 넘었고, 2010년 12월 현재 126만 1415명으로 전체 인구의 2.6%에 달한다. 이와 같은 추세로 외국인이 증가하면 2050년에는 인구의 9.2%가 외국인이 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외국인의 증가에는 무엇보다 외국인 근로자와 결혼 이민자의 몫이 컸다. 외국인 근로자의 유입은 앞서 설명했듯이 1987년 이후 국내 노동시장에서 발생한 인력난 부족 때문에 발생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1991년에는 4만 5449명이 국내에서 취업하였고, 1995년에는 14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직후에는 그 수가 감소하였지만 경기가 회복되면서 다시 급증하기 시작하였고, 2009년 말 외국인 근로자는 약 7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총취업자의 약 3%, 임금 근로자의 4.4%에 해당한다.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결혼이민자의 증가도 외국인의 증가에 큰 몫을 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부터 2005년까지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은 약 15만 9000명을 넘으며,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도 약 8만 명을 넘는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국제결혼 건수는 총 22만 2414건이고, 이중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국제결혼은 16만 8543건,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의 국제결혼은 5만 3871건이다. 2010년 12월 현재 국내 체류 결혼이민자 수는 14만 1654명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국제결혼의 역사는 한국전쟁으로까지 올라간다.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전쟁 이후 연 4만 명의 주한 미군이 주둔하였다. 따라서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고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결혼을 목적으로 해외로 이주하는 사례는 많이 줄어들었다. 1981년에는 결혼을 목적으로 한 해외이주자의 수가 6,187명이었으나 2003년에는 1,113명으로 줄어들었다.

1992년 초반에 국제결혼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면서 한국의 농촌 총각들이 중국 조선족 여성들과 혼인을 하게 되자 여성결혼 이민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일교가 신앙을 목적으로 일본, 필리핀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의 혼인을 주선하면서 비한인 아시아여성들이 결혼이민자로 입국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국제결혼 중개업자들이 개입하면서 국제결혼은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송출국도 다양하게 늘어났다. 이때부터 필리핀, 베트남, 태국, 몽골,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특히 2003년 이후에는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이 급격히 늘고 있다. 이로 인해 외국인과의 결혼은 1990년 4,710건에 불과하였으나 2005년에는 4만 3121건으로 9배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전체 결혼에서 국제결혼의 비율이 1990년 1.2%에서 2005년에는 13.6%를 차지할 만큼 증가했다가 그 이후 다소 감소하는 추세이다.

결혼이민자의 국적 분포를 살펴보면 2010년 12월 현재 중국 47.1%(한국계 중국인 22.4%+기타 중국인 24.7%), 베트남 25%, 일본 7.4%, 필리핀 5.3%의 순으로 되어 있다. 성별로는 여성이 86.6%로 남성 13.1%에 비교해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다문화가정 내 자녀들도 증가하였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의 통계에 따르면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국제결혼가정 자녀는 3만 40명인데, 이중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의 비율이 78.6%로 월등히 높다.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 가정 자녀는 1,748명으로 이중 62.9%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아직까지 다문화가정의 문제는 주로 학습과 관련한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만 앞으로 10년 후 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민족과 이민의 문제

재외동포의 현황과 문제

앞서 보았듯이 재외동포는 모국과 거주국의 상이한 요인들에 의해 이민을 가게 되었고, 거주국별로 상이한 이민 및 민족정책에 따라 적응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주요 재외동포 집단의 적응 양식과 문제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족은 과거에는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였으나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상업을 포함한 2차, 3차 산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타민족에 비교해서 높아졌다. 소득과 교육에서는 여전히 타민족과 비교해서 높은 수준이지만 타민족에 대한 비교우위는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이다. 거주지면에서 살펴보면 과거에는 동북3성의 농촌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여 살았지만 1980년대 이후 대도시와 연해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면에서는 과거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종교활동이 미미하였으나 개혁개방 이후 한국 또는 재미한인 개신교회들의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개신교들이 늘어가고 있다. 민족문화와 정체성 유지와 관련하여 조선족의 민족어 사용수준은 여타 재외한인보다 높다. 족내혼, 민족문화와 관습의 유지 및 실행 수준이 높고, 높은 민족동일시와 애착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족은 과거에는 고립형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중국 주류사회의 기회구조에 참여하면서도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용형으로 전환되고 있다.

고려인은 조선족과 같이 과거에는 주로 농촌 집단농장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적인 직업, 즉 전문직과 관리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구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자영농 또는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소득과 교육에서는 여전히 민족에 비교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만 젊은 세대가 고등교육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타민족에 대한 비교우위가 떨어지고 있다. 종교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구소련 체제에서는 종교활동이 미미하였지만 1990년대 초부터는 한국 및 재미한인 개신교회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개신교도들이 늘어가고 있다. 현재 이민 3,4세가 주류를 이루는 세대구성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문화로의 동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민족어 사용능력이 매우 낮고, 타민족과의 족외혼 비율이 높다. 하지만 언어, 문화적 동화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은 높은 민족동일시와 애착심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인은 초기에는 고립형이 지배적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수용형이 증가하고 현재는 동화형으로 넘어가는 추세이다.

재일한인은 과거에는 육체노동, 단순직에 종사하여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으나 1960년대 이후부터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 늘어나고 자영업 참여자들이 증가하면서 점차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과거에는 교육수준이 낮았으나 현재는 일본인 평균수준과 동일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거주지면에서는 이주 초기부터 대도시에 집중하였으나 점차 한인 밀집주거지역에서 분산되고 있다. 종교는 토속신앙, 불교, 기독교가 혼재된 상태이고, 개신교회 선교활동이 전체적으로 미미하나 뉴커머를 중심으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재일한인의 일본 사회문화로의 동화수준은 타지역 재외한인에 비교해서 높다. 이는 이민 2, 3세가 재일한인의 주류를 차지하기 때문이며,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민족문화와 민족정체성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재일한인의 민족어 사용능력은 낮고 일본인과 혼인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재일한인의 정체성은 타지역 재외한인에 비교해서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이는 세대뿐만 아니라 국적 및 이념에 따라 정체성이 다양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재일한인은 초기에는 고립형이 지배적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수용형이 증가하고, 현재는 동화형으로 넘어가는 추세이다.

재미한인은 이민 초기에는 농장, 단순직에 종사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의 신 이민자들은 주로 자영업에 참여하고 있다. 소득과 교육면에서는 미국의 타민족에 비교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전체적으로 중류층의 계층지위를 점유한다. 주거면에서 1970∼1980년대에는 도심의 코리아타운에 한인들이 집중하였으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1990년대부터는 교외화가 두드러졌다. 교외로 이주하는 한인들을 따라 교외에 코리아타운들이 작은 규모로 형성되었다. 종교에서는 이주 초기부터 개신교회는 한인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직이고 한인의 60∼70%가 교회에 출석할 정도로 종교활동이 활발하다. 재미한인은 아직 이민 1세가 주류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문화로의 언어, 문화적 동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민 2∼3세의 한국어 사용능력은 매우 낮고 이들의 타민족과의 족외혼은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식의 식생활을 유지하고 한민족으로서 강한 민족동일시와 애착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초기에는 고립형이 우세하였으나 현재는 수용형이 지배적이고, 이민 2세 이후에는 동화형으로 전환되고 있다.

캐나다 한인은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해서 아직까지는 현지에서의 정착이 최대 과제이다. 한국에서의 높은 교육수준과 중산층 배경에도 불구하고 현지 사회에서는 출신배경에 상응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영업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 소득은 타민족에 비교해서 대체로 높으나 중류층 또는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미한인과 마찬가지로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나 교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코리아타운도 근교에 형성되고 있다. 이민교회는 한인의 중요한 신앙공동체이면서 사회문화적 조직이고 대다수의 한인들이 한인 개신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아직 이민 2,3세의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캐나다 사회문화로의 동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민 2,3세의 한국어 사용능력은 낮은 수준이고 타민족과 혼인하는 경우도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민족으로의 정체성과 애착은 높게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초기에는 고립형이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수용형이 지배적이고 2세 이후에는 동화형으로 전환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재외한인이 거주국에서 보이는 사회문화 적응유형은 시기와 거주국에 따라 다르지만 다음과 같은 일반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정착초기에는 고립형이 우세하나 거주기간이 길어지면서 수용형과 동화형이 증가한다. 둘째, 동일 재외한인 집단 내에 여러 적응유형이 공존하고 민족정체성도 다중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적응유형은 이주세대, 계층, 거주지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대체로 이민 2,3세 이상, 중상층, 도시거주민들 중에서 수용형과 동화형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셋째, 주변화형에 속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즉 재외한인이 거주국이든 모국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소속감을 갖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주자의 신분으로 거주국 사회에 편입되고 거주국에서 인구와 권력면에서 소수집단인 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동화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색소수민족으로 다수 지배집단에 의해서 구별되고 차별받는 상황에서 한인은 거주국 사회로의 완전한 동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은 거주국 사회의 제한된 기회구조 내에서 신분상승을 추구하면서도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용의 전략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거주기간이 길어지고 이민세대가 1, 2세에서 3, 4세로 넘어가면서 한인의 가치정향성은 모국에서 거주국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민 3, 4세에게 민족문화는 지켜져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이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족끼리 결혼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거주국의 타민족 · 인종과의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민 3, 4세는 민족공동체로부터 멀어지고 민족정체성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장기적으로 한인의 사회문화 적응유형은 수용형에서 동화형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반적인 추세를 늦출 수 있는 새로운 변화가 재외한인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이후 교통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시공간이 압축되고,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는 물적, 인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주민들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및 문화적 네트워크를 통해 모국과 거주국에 연결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초국가주의이다. 여타 국제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외한인도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문화접변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유연하고 다중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조선족의 이주와 경제생활, 그리고 가족생활이 초국가적 공간으로서의 동북아시아에서 이뤄지고 있고, 미국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코리안 아메리칸들이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따라서 모국과 거주국 간의 초국가적 네트워크는 자칫 거주국의 주류사회문화에 동화되어 사라질 수도 있는 재외한인 차세대에게 모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하여 재외한인 차세대 중에서 한민족 정체성이 부흥하고 모국과의 네트워크를 자신의 경력개발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

다문화 사회의 문제

1980년대 말부터 인종, 민족,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이주민들이 증가하면서 한국사회는 다문화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에서는 이주민들의 사회적응 및 사회구성원 간 통합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외국인의 인권보호와 사회적응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국민인식은 과거에 비교해서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은 겉으로는 다문화를 표방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동화주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상호공존보다는 ‘한국화’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 보호 및 지원의 대상을 합법적 외국인에 한정함으로써 정작 도움이 가장 필요한 불법체류 외국인들은 정책 대상에서 배제되고 있다. 또한 여성가족부의 2007년 국제결혼이민자에 관한 국민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64%가 한국을 단일민족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일반 국민이 외국인을 한국사회의 주체로서 받아들이는데 여전히 인색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화의 흐름 속에 단일민족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는 국민도 73%에 달했다. 이러한 결과는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 전통은 인정하지만, 세계화라는 흐름과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순혈주의에만 매몰되어선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정부의 외국인과 다문화가족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과 일반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이 확대되면서 외국인과 결혼이민여성들의 처지는 과거에 비교해서 크게 개선되었다. 국내 외국인 중 가장 큰 집단인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고용허가제의 실시로 인해 노동권과 근로조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송출비용, 계약사항과 실제 근무조건의 불일치,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 산업재해, 건강검진 및 안전교육 부재, 차별 대우, 언어폭력 및 폭행 피해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언어와 문화적 차이, 유색인종과 저개발국가 출신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과 차별, 경찰폭력, 타향에서의 식생활의 어려움, 종교공간 부재에 따른 종교생활의 어려움, 의료 등 복지제도에서 배제되는 문제, 법적 권리의 미보장에 따른 불이익 등의 다양한 문제가 있다. 불법체류자의 경우에는 단속과 추방의 두려움이 더해진다. 또한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으로 안전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고 사소한 사건이 인종 간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가 크다.

여성 결혼이민자의 경우 한국의 사회문화에 대한 지식과 한국어 구사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여 문화적 충격이 크다. 또한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결혼한 한국인 남편의 상당수가 기대와는 달리 무직 또는 빈곤층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에 대한 실망감이 크고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과 폭력, 언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혼이 파경을 맞고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국제결혼가족의 이혼이 급증하고 있어서 2002년의 1,866건에서 2007년에 8,828건으로 4.7배 증가하였다. 통계청의 2008년 이혼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부부의 이혼은 2007년에 비교해 7.5% 증가했으나 한국인-외국인 부부의 이혼은 29.8% 증가하였다.

다문화가정 자녀는 한국어 능력 부족, 학습부진, 학교 내에서 집단 따돌림 등의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불법체류 외국인 자녀의 대다수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미진학 또는 중퇴하는 경우가 늘어나서 성인이 되었을 경우 사회․경제적 하층계급을 형성할 가능성 높다. 자신들 문제의 원인을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서 찾을 경우 이들은 사회불만세력으로 성장하게 되고 2005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아랍계 청년들에 의한 집단소요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이주민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이들이 우리나라에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국민 의식을 다문화적으로 선진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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