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해는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주1 학중면 임명동에서 한의사 겸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간도 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의 손에서 가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 배운 주2과 성진보통학교에 3년 정도 재학한 것 외에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청춘(靑春)』 · 『학지광(學之光)』 등의 잡지와 이광수의 글을 읽으면서 혼자 문학을 공부했다. 1918년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가 이곳저곳을 떠돌며 두부나 건어물을 팔기도 하고 잡역부로 노동을 하면서 문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특히 회령에서의 경험은 작가 활동을 시작하는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당시 회령은 주3와 노동 주4를 통해 가난한 노동자들이 토론과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공간이었다. 최서해는 회령의 노동 단체 '신우조'에 참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계획했다.
최서해는 1924년에 작가가 될 결심을 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홀로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그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奉先寺)에서 생활하며 글을 썼으나, 주지와의 불화로 두어 달 후 다시 상경해 방인근이 운영하던 조선문단사(朝鮮文壇社)에 입사하였다. 자신의 등단지인 동시에 조선의 문단지를 자처하던 『조선문단』이 자금난으로 종간되자 1927년 현대평론사(現代評論社)의 기자로 일했고, 기생들의 잡지인 『장한(長恨)』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926년 최서해는 친구이자 시조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녀와 결혼했으며 1929년부터는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 활동했고 『중외일보』가 검열난과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하자, 1931년부터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주5』의 학예 부장으로 일했다. 1932년 7월 9일, 최서해는 오래도록 고통을 주었던 위장병으로 31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최서해는 1924년 1월 『동아일보』 월요란(月曜欄)에 단편소설 「토혈(吐血)」을 발표한 일이 있으나,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같은 해 10월 『조선문단』에 「고국(故國)」이 추천되면서부터였다. 「토혈」이 첫 작품이라면, 「고국」은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대략 장편 1편, 단편 35편 내외를 발표하였다.
그의 소설들은 가난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경험 없는 것은 쓰지 않으려 한다”는 스스로의 말대로 대개 체험을 소설화했다. 주요 작품으로 「탈출기(脫出記)」(『조선문단』, 1925) · 「기아(饑餓)와 살육(殺戮)」(『조선문단』, 1925) · 「홍염(紅焰)」(『조선문단』, 1927) 등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박돌(朴乭)의 죽음」(『조선문단』, 1925) · 「큰물 진 뒤」( 『개벽』, 1925) · 「무서운 인상(印象)」( 『동광』, 1926) 등 함경도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팔개월(八個月)」(『동광』, 1926) · 「전기(轉機)」( 『신생』, 1929) · 「전아사(錢迓辭)」(『동광』, 1927) 등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빈궁상을 그린 소설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이 겪고 있던 빈궁상의 제시는 상상력의 소산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최서해의 작품을 ‘체험 소설’ 혹은 ‘기록의 소설화’로 평가하는 이유가 된다.
빈궁 속에 고통받는 조선인들의 호소와 절규를 그린 최서해의 소설은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박영희와 김기진 등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주요 비평가들은 최서해를 프로문학의 예비적 단계로 평가하고 신경향파로 명명했다. 최서해의 소설은 이후 목적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프로문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두만강 주변에서의 경험과 이를 형상화한 그의 소설은 변방으로 밀려나는 식민지 조선인의 현실을 새롭게 환기하는 장소성을 지니고 있고, 또 국경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횡단성과 경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