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북부여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
개설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두막루의 멸망에 대해 726년까지 제1송화강 유역에서 북진정책을 추진하던 발해와 흑수말갈의 치열한 대치상황에서 두막루국이 세력을 잃고 두 나라에 점령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황
먼저 두막루를 부여와 별개의 국가로 파악하는 견해는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따른 두막루인의 인식이 그들 스스로를 북부여의 후예라고 자칭하게 한 것으로 보고, 구체적으로는 실위와 같은 몽골계 종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두막루를 북부여의 후예로 보는 견해는 우선 그 건국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두막루를 부여의 후국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부여의 멸망 이후로 보기도 하고, 부여의 멸망을 광개토왕대인 410년의 동부여 멸망 이후 북으로 옮겨간 시기로 보기도 한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두막루와 부여를 동시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로 보며,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에 공파(攻破)된 동부여의 유민이 북상하여 건국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두막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당서』의 기록에 나오는 나하와 흑수(黑水)를 어디로 비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흑수는 흑룡강으로 보고 이곳으로 유입되는 하천인 동쪽으로 흐르는 제1송화강을 나하로 비정해, 두 강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중국 북동부의 흑룡강성 동북쪽 끝의 삼강평원(三江平原)의 곤토령(滾兎嶺)문화·봉림(鳳林)문화의 고고학적 문화 계통을 물길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 두막루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 문화층을 3단계로 나누어 전기단계인 곤토령문화시기(서기전 2세기~서기 2세기), 발전기인 봉림문화시기(서기전 2~5세기), 그리고 말갈계문화로 전환되는 물길-두막루단계(서기 6~7세기)로 세분화 하고 있다. 두막루로 보는 견해는 이 지역의 토기, 주거지, 온돌, 성지 규모의 차이 등으로 볼 때 기존의 말갈계통의 고고학적 문화와는 차별화된 옥저계로 보고 이를 두막루 문화로 보는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
- 『신당서(新唐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 『책부원귀(冊府元龜)』
- 「삼강평원 곤토령·봉림문화의 형성과 물길·두막루·말갈의 출현」(강인욱, 『고구려발해연구』 52, 2015)
- 「부여족의 분산과 이동」(김기섭, 『부여사와 그 주변』, 2008)
-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유태용, 『백산학보』 70, 2004)
- 「두막루국에 대하여」(권승안, 『력사과학』 2004-1, 2004)
- 「부여국의 강역과 그 변천」(노태돈, 『국사관논총』 4, 1989)
-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박경철, 『백산학보』 40, 1992)
-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김정배, 『국사관논총』 29, 1991)
- 「豆莫婁考」(魏國忠, 『學習與探索』三期, 1982)
-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張博泉, 『黑龍江文物叢刊』 第2期, 1982)
- 「豆莫婁國考」(馮家昇, 『禹貢』 半月刊 7卷 第一·二·三 合刊,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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