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高勝)의 가계와 생몰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고구려는 603년(영양왕 14) 영양왕(嬰陽王)의 명으로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고승은 장군이었다고 하였다. 장군은 전시의 야전군 사령관으로 제5관등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승이 공격한 북한산성은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으로 파악된다. 아차산성은 한강의 수로 교통로가 교차한 전략적 요충지로, 지표 및 시굴 조사를 통해 ‘북(北)’, ‘한(漢)’, ‘한산(漢山)’ 등의 명문이 좌서(左書)된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고승의 북한산성 공격에 대해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출전해 구원하였다. 진평왕은 직접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넜는데, 이에 북한산성 안에서는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서로 호응하였다. 그러자 고승은 신라 군사의 수가 고구려 군사의 수보다 많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퇴각하였다. 603년 고구려의 북한산성 공격은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고, 신라와 수의 연결을 견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남방 정책에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신라 역시 604년 남천주(南川州)를 폐지하고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한 데서 드러나듯 한강 유역에 대한 방어를 더욱더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