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5대 평원왕의 첫째 딸인 공주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삼국사기』 온달전에 평강공주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주로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갈 것을 고집하다 궁궐에서 쫓겨나 온달 집을 찾아가 혼인한 뒤 눈먼 시어머니를 공양하며 온달을 이끌어 훌륭한 장수로 키워냈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신분제도와 관행으로 볼 때 매우 파격적인 이 이야기는, 하급 귀족신분에 속하지만 뛰어난 무사이던 온달에게 공주가 시집간 사정을 야유하고 시기하던 귀족사회가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하였다. 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어 왕이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보내려했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해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온달이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 온달은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이를 매장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이에 후대 사람들은 그녀를 문벌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애정에 의해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우한 처지의 남편을 입신출세할 수 있도록 도운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온달전의 내용은 설화적인 면이 짙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이 풀이해볼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출신이 미천한 바보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니었고, 아마도 하급귀족 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탁되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반발도 있어 왕이 취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집갔다.
이 파격적인 공주와 온달간의 결혼을 두고 당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야유와 시기를 하게 되어,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게 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이나 신분에 속한 이를 이상하게 생긴 못난 인물로 묘사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널리 보인다.
설화의 내용을 이렇게 풀이해 본다면, 평강공주의 모습은 고구려 귀족사회 안에서 주체적인 행보를 보인 현명하고 정열적인 여인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