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은 삼국시대 백제에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이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와니기시[和邇吉師]’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천자문』이 편찬된 시기 등을 근거로 윤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 말기에 태자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성립하였는데, 그 답례로 인적자원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백제의 오경박사 등이 왜국으로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전수하여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에는 그의 이름을 ‘와니기시[和邇吉師]’라 하였고,『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왕인(王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아신왕(阿莘王) 말년경에 왜국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서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신왕 말기로 추측되는데, 당시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남정(南征)으로 백제가 태자 전지(腆支)를 왜국에 파견하고 왜국에서도 병력을 지원하는 등 양국의 군사동맹이 성립하고 우호관계로 나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왜국의 백제 파병은 태자 전지의 외교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고, 5세기 초 전란의 종료 직후 백제는 그 답례로 인적자원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역사에는 전혀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阿直岐)를 왜국에 파견해 왜국 왕에게 말 두 필을 보냈는데, 이때 일본 오진왕(應神王)이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알고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아직기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왕이 아라타(荒田別) 등을 보내 학덕이 높은 학자를 보내주기를 청하니, 왕인(王仁)이 추천되었다.
왕인은 『논어(論語)』 10권,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전하며,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고 한다. 왕인은 인덕과 보조(寶祚)를 비는 파진가를 불러 가부(歌父)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河內)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史)가 되었으며, 왜국 조정에 봉사하였다.
이와 같이 아직기가 먼저 이주한 후 왜국 조정으로부터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인물의 추천을 의뢰받아 왕인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같은 백제계(百濟系)라는 동족적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 『천자문』은 중국 남조의 양(梁) 무제(武帝: 502∼549) 시기 주흥사(周興嗣)에게 명하여 편찬된 것으로 5세기 초 왕인의 도래시기와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또 율령제(律令制) 하에서 황태자를 가르치는 동궁학사(東宮學士)는 문무천황(文武天皇)이 황태자 시절이었을 때 두어졌다. 즉 이예부마감(伊預部馬甘)이 황태자학사(皇太子學士)가 된 예가 최초이므로 왕인이 맨 처음 동궁학사가 되었다는 것은 부분적인 윤색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로부터 왜국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비롯해 재봉녀(裁縫女) · 직공(織工) · 야공(冶工) · 양주자(釀酒者) · 도공(陶工) · 안공(鞍工) · 화원(畵員) · 금공(金工) · 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전수하여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王仁石像)을 비롯해 왕인이 독서했다는 왕인책굴(王仁冊窟) 등이 있다. 무덤은 일본 오사카(大阪)과 교토(京都)의 중간 지점인 히라카타(枚方)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