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직을 버리고 세 아우와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봉산군수, 진도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 · 의병장.
이칭
덕로(德老)
시호
장양(莊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3년(명종 8)
사망 연도
1607년(선조 40)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진도군수
관련 사건
임진왜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직을 버리고 세 아우와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봉산군수, 진도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 · 의병장.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훈련원판관 김대유(金大有)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세훈(吳世勳)의 딸이다. 용력이 뛰어나 김천수(金千壽)·김백수(金百壽)·김구수(金九壽)의 세 아우들과 함께 용맹으로 널리 알려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고 감찰·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풍천부사(豊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봉산 고향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세 아우 및 진사 최섭(崔涉)·이옹(李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900인을 모으고 의병 대장에 추대되었다.

세 아우를 선봉장으로 삼고, 급히 장단(長湍)으로 나가 조방장 유극량(劉克良)과 합병해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했는데, 김백수는 조방장과 함께 파주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두 아우와 함께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 다시 봉산으로 돌아와 의거할 준비를 하며 오위도총부도사인 아들 김광협(金光鋏)과 함께 황해도 여러 읍의 적정을 탐문하였다.

이어 순변사 이일(李鎰)에 의해 임시로 봉산군수에 임명되어 민심을 안정시켰고, 여러 군(郡)의 군사들과 합세해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의병장의 호를 받았으며, 선전관에 임명되어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3전 3승을 거두었으나 아들 김광협을 잃었다.

1593년 진도군수가 되어 한산도와 광주(光州)에 각각 진을 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군대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난중의 공적이 참작되어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봉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장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