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과 국선을 동의어로 보는 관점과 낭도(郎徒)가 있고 낭도를 거느리는 여러 명의 화랑(花郞) 중에서 총지도자로서 한 명의 국선(國仙)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국선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화랑이 서술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화랑국선’이 병기되어 있으면서 역대 국선의 사적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외에도 도교(道敎), 미륵(彌勒)신앙, 산신(山神)사상과 연관된 미륵불(彌勒佛)의 화신(化身)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선(仙)’의 유래에 따라 동국(東國) 고대(古代)의 신선(神仙)사상인 ‘선도(仙道)’ 혹은 ‘선교(仙敎)’로부터 기원했다는 자생설과 중국 도교로부터 기원했다는 전래설이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4 ‘진흥왕37년’를 보면,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고 하였고, 『삼국유사』「탐상」4의 진흥왕 기사에는 “양가의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이라 하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이다(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娘(郞) 始奉薛原郞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라고 하였다.
또한 화랑도는 도의(道義)를 연마하고(相磨以道義) 가악(歌樂)을 즐기며(相悅以歌樂) 산천을 유람(遊娛山水 無遠不至)하며 수련하였는데, 그 중에 착실한 자는 조정에 천거되어 어진 재상이나 충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되었다. 이러한 기록과 함께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나라를 흥성시키기 위해 ‘풍월도(風月道)·풍류도(風流道)·화랑도(花郞道)’를 근간으로, 당시 귀족 출신이나 상류층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올바른 사람을 뽑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고,특히뛰어난 자를 받들어 ‘국선(國仙)’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국선을 살펴보면, 초대 국선은 진흥왕 때의 설원랑(薛原郎)이었다. 제26대 진평왕 때의 국선으로는 구참공(瞿旵公)과 김유신(金庾信)이 있었으며, 제32대 효소왕 때에는 부례랑(夫禮郞)이 있었으며, 제48대 경문왕 때에 요원랑(邀元郞)이라는 국선이 있었다. 경문왕의 경우, 왕이 되기 전인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선랑(仙郞)’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중국 도교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는 주장과 화랑의 여러 명칭에 대한 이칭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신라시대의 고대사 연구 및 종교사 연구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