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공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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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학(私學)인 12도(十二徒)의 하나.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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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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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사학(私學)인 12도(十二徒)의 하나.
내용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도 한다. 1055년(문종 9) 벼슬에서 은퇴한 최충(崔冲)이 후진양성을 위하여 설립하였다. 송악산(松岳山) 아래 자하동(紫霞洞)에 사숙(私塾)을 개설하자 수많은 학도들이 모여들었다.

교육의 편제를 전문강좌별로 낙성(樂聖) · 대중(大中) · 성명(誠明) · 경업(敬業) · 조도(造道) · 솔성(率性) · 진덕(進德) · 대화(大和) · 대빙(待聘)의 9재(九齋)로 나누었으며, 생도들은 수학능력에 따라 소속한 재에서 차례로 승재(陞齋)할 수 있게 하였다.

교육내용은 주로 9경(九經) 3사(三史)를 위주로 하여 시부(詩賦)와 사장(詞章)을 아울러 수학하도록 하였다. 매년 여름철은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하과(夏課)를 열었으며, 소속 문도(門徒) 중에서 급제자로서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교도(敎導)로 삼아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문도 중에서 급제하여 조관(朝官)이 된 자가 찾아오면 재생(齋生)과 더불어 각촉부시(刻燭賦詩)의 대회를 열어 종일토록 수창(酬唱:시가를 불러 서로 주고 받음)하였다. 이 때의 의식은 질서정연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문도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연이어 배출되었다.

1068년 최충이 죽자 국가에서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그의 문도들은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칭하게 되었다. 문헌공도는 그 뒤 12도의 대표적 위치에 올라 고려 말까지 전승되었다. 무인집권기에도 이승장(李勝章)이 문헌공도의 솔성재에서 수학하였고, 이규보(李奎報) 또한 14세 되던 해 문헌공도 성명재에 입학하고 있었음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사실은 몽골 침략기인 1244년(고종 31) 강화시대(江華時代)에 시랑 이종주(李宗胄)가 고종의 명을 받들어 9재생도들을 연미정(燕尾亭)에 모아 하과를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 강화(江華) 누정조(樓亭條)에 나타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고려 전기는 문헌공도를 비롯한 12도가 국립대학인 국자감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으나, 고려 후기는 국자감 중흥정책이 나타나면서 격하되어 향교와 국자감의 중간 위치를 겸하고 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자감과 사학」(박성봉, 『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고려시대의 유학발달과 사학십이도의 공적」(박성봉, 『사총』2, 1957)
「고려시대교육제도에 대한 일고찰」(김정옥, 『이화여대칠십주년기념논문집』, 1956)
「麗末鮮初の私學」(柳洪烈, 『靑丘學叢』2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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