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 · 병조좌랑 ·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정언(正言) · 지평(持平) · 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 때 후금이 세력을 날로 키우며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쳐 조선을 무섭게 위협해왔다. 이에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해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오달제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와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오달제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 ·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묵매화(墨梅畫)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 · 조속(趙涑) · 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림은 『묵매도(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 · 홍수주(洪受疇) · 박동진(朴東晉) · 조희룡(趙熙龍) · 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 ·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