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 · 교리(校理)에 오르고 헌납(獻納)을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정랑 · 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해 사필(史筆)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진회(秦檜)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했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윤집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 · 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처음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