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숙은 조선전기 한성부우윤, 공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85년(성종 16)에 태어나 1545년(인종 1)에 사망했다.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적극 반대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기묘당인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고, 신사무옥으로 경주부윤에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다. 1537년 재서용되어 대사헌·대사간, 형조·호조·이조·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윤임과 유관 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네 아들도 모두 교살되었다. 선조 때 대신들의 상소로 신원, 복관되었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호는 정수(靜叟). 유의(柳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종식(柳宗植)이다. 아버지는 사간 유문통(柳文通)이며, 어머니는 이추(李抽)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 · 생원시에 합격했고, 1510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 이조좌랑 · 직제학 등을 거쳐 1515년 홍문관부수찬 · 전한이 되었다. 이 때 사림파의 일원인 박상(朴祥) · 김정(金淨) 등이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유배되자, 이들의 치죄를 둘러싸고 찬반의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신씨 복위 문제를 넘어서 신구 세력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사림파를 대표해 이들의 치죄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어서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11월 김정의 후임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반대 세력인 박호(朴壕) 등의 반대로 철회되었다.
다음해 좌승지를 거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때 대간이 경연에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동지사(同知事) 조광조(趙光祖)도 불가하다고 하자 학식이 없음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당시 사림파의 핵심 인물인 조광조 · 김정 · 김구(金絿) · 김식(金湜) 등은 성균관과 홍문관을 번갈아가면서 장악해 그들의 세력을 더욱 굳히려고 하였다. 그런데 유인숙의 부제학 임명에 조광조 등이 적극 반대한 것은 사림파내의 세력 다툼 때문이었다.
이어서 도승지에 승진했으나, 같은 해 11월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일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조광조 등을 위해 적극 변명하였다. 그 뒤 호조참의가 되었으나 기묘당인(己卯黨人)으로 대간의 탄핵을 계속 받다가, 2년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태를 관망했다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파면되었다.
그 뒤 1537년 재서용되어 병조참의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한성부우윤 · 호조참판 · 대사헌 · 한성부좌윤 · 대사간, 형조 · 호조 · 이조 · 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 우찬성에 올랐다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이기(李芑) · 정순붕(鄭順朋)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 · 유관(柳灌) 등과 함께 종사를 모위했다는 죄목으로 무장으로 귀양가던 도중 진위 갈원(振威葛院)에서 사사되었다.
같은 해 9월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윤임 · 유관 등과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의 추대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네 아들도 모두 교살되었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선조 때 성균관 유생과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한 대신들의 상소로 신원, 복관되었고, 유인숙을 모함했던 이기 · 정순붕 등은 위훈이 삭제되었다. 일찍이 김정과 함께 김정국(金正國) 등의 사림파를 조정에 추천하는 데 적극 앞장서기도 했으나,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20여 년간 재야에 있었다.
다시 서용된 뒤에는 사림의 기대를 받았으나 근신하지 못하고 자주 뇌물을 받아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연에 입시해서는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부진해진 성리학의 진흥에 노력할 것을 촉구했고, 궁중 세력과 결탁한 간신배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힘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