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의정부좌찬성, 지경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기묘사화 후 현량과가 무효로 된 뒤에 음직(蔭職)으로 남아 있다가, 다시 152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모든 현량과 출신들이 쫓겨났으나 홀로 조정에 남아 있어서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그 뒤 1525년 형조좌랑에 이어 예조참의 · 도승지 ·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 연간에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으로 윤임(尹任)이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을 추대하여 대위(大位)를 엿본다고 무고하여, 이른바 을사추성정난공신(乙巳推誠定難功臣)이 되어 광평군(光平君)으로 봉해졌고, 개성유수 · 형조참판 · 평안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호조참의 ·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 뒤 다시 병조판서 ·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 의정부좌찬성 · 지경연사 · 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오직 시의(時議)에 따라 붙는 것으로 발신(發身)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1567년(선조 즉위년)에 삭탈관직의 주장이 있었고, 죽은 뒤에 충훈부(忠勳府)에서 대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논란이 일어났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잡록(海東雜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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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진사 급제 : 『정덕8년계유8월20일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員進士榜)』(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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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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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김명원에 대한 평가 : 『명종실록』 33권, 1566년(명종 21) 8월 16일. "조강에 나아가 유일의 추천 등의 일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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