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칠월 칠석은 두 별이 은하수를 가운데에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는 시기인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화가 생겨났다.
이 설화의 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후한(後漢) 때에 만들어진 효당산(孝堂山)의 석실 속에 있는 화상석(畫像石)의 삼족오도(三足烏圖)에 직녀성과 견우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한(前漢)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는 은하수, 직녀성, 견우성 시구(詩句)가 있다. 후한(25~220년) 말경에는 직녀성과 견우성이 인격화되어 있다. 이 설화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진(晉)나라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408년(고구려 광개토왕 18)에 축조된 대안 덕흥리(大安德興里) 고분 벽화에서 은하수를 가운데에 두고 앞에는 소를 끌고 가는 견우, 뒤에는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 공민왕이 몽고인 왕후와 함께 안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낸 기사가 처음 보인다. 설화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전승되고 있다.
원래 직녀는 하느님[天帝]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하였다. 하느님이 손녀를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河鼓)'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맡은 일을 게을리 하였고, 하느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에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 해 중에 칠월 칠석날 하루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 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烏鵲橋)’라 하였다.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혼례는 인간 성장에 중요한 통과 의례 중 하나이다. 독립된 두 인격체가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각자 맡은 바 직분의 책임감도 더욱 커졌다는 의미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견우와 직녀에게 주어진 벌은 1년이라는 인고의 기다림이다. 신화적 관점에서는 1년에 1번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의 반복은 천체 우주 질서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창조 여신의 창조성이 직조 행위를 통해 발현된다는 점에서 천제의 손녀인 직녀의 길쌈 행위의 중단은 창조 행위의 중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설화를 민속학적 관점에서 보면, 칠월 칠석에 내리는 비는 ‘칠석우(七夕雨)’라 하여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민요는 「칠석요」가 널리 불렸다.
「견우직녀 설화」는 "까마귀도 칠월 칠석은 안 잊어버린다."라는 속담 유래, 민요 「칠석요」 노랫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예로부터 동양권에서 무수히 많은 문인들의 시문의 주제로도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이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칠석우」, 이제현(李齊賢)의 「칠석」, 이곡(李穀)의 「칠석소작(七夕小酌)」, 조선시대 정철(鄭澈)의 「차광한루운(次廣寒樓韻)」, 김정희(金正喜)의 「칠석칠률(七夕七律)」, 여류 시인들의 것으로 이옥봉(李玉峯)의 「칠석가」, 삼의당(三宜堂)의 「칠월칠석」, 운초(雲楚)의 「강루칠석(江樓七夕)」, 정일헌(貞一軒)의 「칠석」 등이 있다. 그 밖에 「춘향전(春香傳)」을 비롯한 여러 고전 소설, 「규원가(閨怨歌)」 · 「해조가(諧嘲歌)」 · 「과부가(寡婦歌)」 ·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 「화조가(花鳥歌)」 · 「사미인곡(思美人曲)」과 같은 가사, 시조, 일부 지역 민요 「달풀이 노래」, 「회다지소리」, 「고사소리」 등 노랫말에도 반영되어 있다.
「견우직녀 설화」는 칠월 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