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음보 1행의 가사체를 기준으로 75행이고, 서사(8행)·본사(55행)·결사(12행)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학민(1857∼1939)이 필사한 52장본과 윤석주(1883∼1953)가 필사한 52장본이 1989년까지 전해져 왔으나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는 『기수가(淇水歌)』(육화회, 해교인쇄사, 1989)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책자에 영인되어 있다.
1867년경에 올케인 서흥 김씨가 지은 〈답기수가〉의 내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시누이들이 올케들의 편견을 고치고 그 잘못을 이해시키고자 다시 〈위유가〉와 함께 이 〈해조가〉를 지었다.
서사(8행)인 제 1단락(어와요보 사람들아∼꿈같고도 맹랑하다)에서 작가인 시누이는 어린 시절 친정인 화양동에서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숙모님을 칭찬하고 있다. 본사(40행)의 제2단락(어찌하여 복희씨는∼대강이나 일어리라)에서는 복희씨(伏羲氏)가 시집가는 법을 만들어서 시댁에 가서 고생을 하고 친정을 찾아서 즐겁게 놀고 나서 가사를 지었는데 올케가 답가로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어 다시 가사를 지어서 대강이나 경계하고자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본사(15행)의 제3단락(양반으로 의논컨대∼내도로혀 점잔찮다)에서는 양반 자랑을 하려면 화양동에서는 남자들이 많아서 외손자를 푸대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참겠다고 한다. 결사(12행)인 제4단락(그러하나 그대가사∼이밖에 할 말 없네)에서는 올케가 다시 가사로 양반 자랑을 하고 짧은 문장으로 치졸하게 글을 쓰지만 마음을 풀 수가 없으니 떡과 술, 그리고 안주를 장만하여 자신의 마음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 가사는 시누이들의 겸손함과 친정인 화양동의 외손 무시 태도를 비판하며 시누이들의 양반 자랑과 문필을 과시하는 작품이다.
19세기 말에 합천 화양동에서 지어지고 향유된 『기수가』에 수록된 9편의 작품 중에서 시누이와 올케의 갈등을 가중시키는 2차 토론과 논쟁을 촉발시킨 규방가사이다. 토론과 논쟁의 형식을 규방가사의 글쓰기로 표출한 것으로, 조선후기 여성들의 문중의 삶을 관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