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조선전기 학자로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86년(성종 17)에 태어나 1521년(중종 16)에 사망했다. 1507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순창군수로 재임하던 시기에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제주풍토록」을 저술했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1545년에 복관되고, 1646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상현서원, 신항서원, 귤림서원,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 · 고봉(孤峯). 보은 출신.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 ·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 · 부교리(副校理) · 헌납(獻納) · 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 · 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 · 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 · 부제학 · 동부승지 · 좌승지 · 이조참판 · 도승지 ·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 ·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 · 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 · 김고(金顧) · 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 · 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