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언회(彦晦). 고려 시중(侍中) 정렬(貞烈) 경복흥(慶復興)의 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산군수(珍山郡守) 경면(慶綿)이고, 아버지는 지평 경세청(慶世淸)이며, 어머니는 상주김씨(尙州金氏)로 김양완(金良琬)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22년(중종 17) 진사가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다가 1543년 장령 · 헌납 · 직강을 거쳐 이듬해 사간원사간으로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租) 등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그뒤 시강원우필선 · 사헌부집의 · 승문원판교를 역임하였으며,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48년(명종 3) 병조참지, 이듬해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551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과(禪科)를 설치하려 하자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기신재(忌晨齋)의 시행도 극력 반대하였다.
그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예조 · 이조 · 호조 · 병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노쇠하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1561년 장례원판결사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곧 체직당하였으며, 오위장을 거쳐 71세로 죽었다. 경혼은 4조(四朝)에 걸쳐 벼슬하였으며, 언관(言官)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