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강중진(康仲珍)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강유선(康惟善)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 · 직장(直長) ·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군수로 옮겼는데, 이때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1599년(선조 32) 고양군수를 거쳐 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인 왕자로 지낼 시기)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 · 우부승지를 거쳐 평산부사 · 전주부윤 · 청송부사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1617년(광해군 9)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이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군수를 제수받았으며, 곧 성주목사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찍이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 정밀하면서 깊음)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받은 바도 있었다.
저서로는 『죽간집(竹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