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용휴(用休). 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안숭효(安崇孝)의 딸이다.
문음(門蔭)으로 군기시주부가 된 뒤 돈녕부첨정을 거쳐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고, 이어서 좌통례(左通禮) · 사헌부집의 ·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을 거쳐, 1486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이등으로 급제하여 상주목사로 나갔다.
1492년 장례원판결사가 된 뒤 이듬해 부제학 · 이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좌승지 · 도승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서 추국(推鞫)에 참여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士林派)의 처벌을 가벼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형조판서, 이듬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502년에는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병조판서로 재임중 세자책봉주문사(世子冊封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찬성에 올랐다.
1505년 우의정이 되어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던 중 이듬해 평안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하고 직무에 엄밀하여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이조판서에 재직하였는데, 이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전주(銓注)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연산군이 날로 음탕하고 흉포해지자 폐립(廢立)의 뜻을 품고 있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