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태종 17) 태어났다. 1432년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434년 알성시(謁聖試)에 입격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를 비롯해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등 주로 집현전에서 근무하였다.
1438년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되었고,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응시해서 다시 급제하였다. 문종 즉위 후에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고, 이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을 거쳐 우승지와 좌승지에 차례대로 임명되었다. 『세종대왕실록(世宗大王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4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 觀察使)가 되었다가 예문제학(藝文提學), 형조참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되었다.
1456년(세조 2) 정창손(鄭昌孫)의 사위 김질(金礩)이 박팽년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 복위를 시도하였다고 고발하었다. 박팽년은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공초(供招)를 받다가 심한 고문 때문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 박중림은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고, 동생 박대년과 세 아들 박헌 · 박순 · 박분 모두 처형되었다. 다만,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였기 때문에 처형을 면하였다. 단종 복위를 주도하였던 6명의 인물 중 박팽년만이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후손 박충후(朴忠後)는 선조 대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냈다.
박팽년은 문재(文才)(가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명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사신 예겸(倪謙)이 박팽년과 성삼문의 재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칭찬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하지만 역모로 몰려 가문 전체가 몰락했기 때문에 개인 저술 등이 후대에 전해지지는 않는다.
박팽년의 공초 기록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17명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지만, 누가 거사를 주도하였는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후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의 순서로 단종 복위를 주도한 6명의 신하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거사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전」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등의 기록에는 박팽년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세조에 보냈던 장계에 ‘신(臣)’이란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과 세조를 나리로 지칭하였다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세조 대 기록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숙주(申叔舟)나 그의 아내, 동생 신말주(申末舟)에 관한 후대의 야사가 근거가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난 뒤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팽년의 절의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박팽년 등에 대한 평가는 세조 재위 이후 줄곧 역모로 이해되었다. 성종 대에도 박팽년의 행위는 반역 행위로 설명되었다. 남효온은 1478년(성종 9)에 올렸던 상소문에서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세조 즉위와 당시 공신으로 임명되었던 인물들의 명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에 남효온의 상소는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박팽년 등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상황까지는 조성되지 않았다.
중종 재위기부터는 박팽년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제기되었다. 1517년(중종 12) 정순붕(鄭順朋)은 박팽년과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하고자 시도한 일은 처벌을 받아야 맞지만, 그들의 절의는 처벌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이청(李淸) 같은 인물은 이들이 대의(大義)를 따랐으니 난신(亂臣)으로 지칭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중종 재위기부터는 사육신의 단종에 대한 절의가 강조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과정이 기록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팽년 등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어서, 이들에 대한 평가나 배향 문제가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선조 대에도 「육신전」의 서술 내용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691년(숙종 17) 숙종은 관원을 파견해 단종과 여섯 신하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처음에는 대신들의 의견을 묻자는 견해가 있어 바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 숙종은 박팽년 등의 관작을 회복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관작이 회복된 이후 1698년 증직(贈職) 및 증시(贈諡)가 되었다.
1709년에는 경상도 의성(義城) 금학산(金鶴山) 밑에 유생들이 성삼문의 사우(祠宇)를 짓고 박팽년 등 5명의 신하를 향사(享祀)하였다. 향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사액(賜額)을 요청하자 숙종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1758년(영조 34)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다시 증직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또 장릉의 정단(正壇)에 배식된 32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