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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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중종 때, 천거와 시험을 접목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
이칭
이칭
천거과(薦擧科)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518(중종 13)
공포 시기
1518(중종 13)
시행 시기
1519(중종 14)
폐지 시기
1519(중종 14)
시행처
예조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주관 부서
예조
내용 요약

현량과(賢良科)는 1519년(중종14)에 천거와 시험을 접목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다. 문과는 서울과 지방에서 추천받은 이들을 대책으로 시험하여 28명을 선발하였고, 무과는 46명을 선발하였다. 현량과는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인들의 사장 위주의 기존의 제도와 관행을 수정하여 경학을 더 중시하고자 하는 입장이 반영된 과거로, 기묘사화 직후 폐지되었다. 급제자의 자격은 무과는 변동이 없었으나, 문과는 기묘사화 박탈과 회복을 반복하다가 1568년(선조1)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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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중종 때, 천거와 시험을 접목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
내용

현량과는 1519년( 중종14)에 천거와 시험을 접목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사림의 건의에 의해 시행되었다. 신진 사림은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기존의 제도와 관행을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것으로 수정하고자 하였고, 중종 역시 같은 방향을 지향하였다. 중종은 사장을 진작시키는 조처들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았으나, 신유학 서적들을 경연에서 강독하도록 하고 주자학파의 저작들을 간행하고 배포하였으며 『소학』을 최초로 언해하는 등 경학 공부를 장려하였다.

1517년(중종12)부터 조광조를 비롯한 삼사의 관원들은 기존의 과거 제도가 사장 위주로 경학과 덕행을 갖춘 이를 선발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추천에 의한 관리 임용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종래의 과거제가 제도 자체의 본질적인 모순으로 과유(科儒)에게 사장의 학습만을 일삼게 한 나머지, 성리학의 학리추구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소홀히 하도록 만든다고 여겼다. 반면 영의정 정광필, 이조판서 남곤 등은 추천보다는 시험에 의한 관리 선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사대교린(事大交隣)에 있어서 문장이 중요한 만큼 사장과 경술이 모두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 3월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한나라의 현량과와 방정과의 뜻을 이어 천거와 시험을 접목해서, 덕행으로 천거받은 이들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선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해당 제도가 전통적인 과거 제도를 해치고 후보자 추천에 불공정성이 발생할 소지가 있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우찬성 안당대사헌 최숙생 등의 지지를 얻어 별시(別試)로 시행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서울에서는 사관(四館)이 유생과 조사(朝士)를 막론하고 후보자를 성균관천보(薦報)하면, 성균관은 이를 예조에 전보(轉報)하게 되고, 또 중추부 · 육조 · 한성부 ·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 등에서도 예조에 후보자를 천거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수령에게 천거하면 수령관찰사에, 관찰사는 예조에 전보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다음 예조에서는 후보자의 성명과 행실을 갖추어 의정부에 보고한 뒤, 그들을 전정(殿庭)에서 왕이 친히 대책으로 시험하여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1518년 말까지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한 120명의 명단이 마련되었다.

현량과는 1519년(중종 14) 4월 13일 120명 중 그 자질에 대한 예조의 심의를 통과한 추천자들을 근정전에서 대책으로 시험하여, 문과에서는 장령 김식(金湜)등 28명을 선발하였다. 같은 날 모화관에서 무과도 시행하여 정린(鄭麟) 등 46명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현량과는 그 급제자가 공개되자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급제자 명단에 천거제를 지지한 안당(安瑭)의 세 아들 안처근, 안처겸, 안처한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또한 조광조와 절친했던 김식과 지평 박훈(朴薰)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량과 급제자들은 조광조와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이들로, 급제 후 홍문관을 비롯한 사헌부 · 사간원 · 승정원 · 성균관 등 중요 기관의 요직에 기용되어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였다. 1519년 10월 조광조를 비롯한 현량과 출신 관료들은 중종반정의 정국(整國) 공신들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 상소를 올렸고, 이것은 11-12월의 기묘사화로 이어졌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이 축출당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주도하여 시행한 현량과 역시 폐지되었으며, 현량과의 문과 급제자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이들의 자격은 그 뒤 인종 말년에 급제자의 자격은 잠시 복구되었으나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박탈되었고, 1568년(선조 1) 10월에 이르러 완전히 회복되었다.

현량과는 신구 세력, 즉 공신 및 고위 관료와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의 대립을 격화시켜 위훈삭제 문제와 더불어 기묘사화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 시행 과정과 방식 및 급제자 구성을 관련시켜 볼 때, 덕행을 중시한 인재 선발 방식으로 제안된 것이지만 그 목적과 더불어 신진 사림의 세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단행본

계승범, 『중종의 시대』(2014)

논문

에드워드 와그너, 이훈상(역), 「1519년의 賢良科 : 조선전기 역사에서의 위상」(『역사와 경계』 42, 부산경남사학회, 2002)
이병휴, 「현량과(賢良科) 급제자의 성분」(『대구사학』 12·13-1, 대구사학회, 1977)
정두희, 「趙光祖의 復權過程과 賢良科 問題 -16세기 朝鮮 性理學의 性格에 관한 添言-」(『한국사상사학』 16, 200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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