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빙호(氷壺). 보성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안중관(安重寬)이며, 처는 경주 정씨로서 판관 정승복(鄭承復)의 딸이다. 안중돈(安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하고,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안방준의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하였으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다.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하고,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에 지방의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벼슬에 등용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선비)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대의 유성룡(柳成龍)에 비유하며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 기를 숭상함)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 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으로 안방준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 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안방준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李大源傳)』·『호남의병록(湖南義兵錄)』·『삼원기사(三寃記事)』·『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혼정편록(混定編錄)』·『매환문답(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