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 족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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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무신 우성적 등 1600년 예안에서 간행한 단양우씨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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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무신 우성적 등 1600년 예안에서 간행한 단양우씨의 족보.
내용

흔히 ‘단양우씨 예안본(禮安本)’이라고 한다.

가로 23㎝×세로 31㎝, 44쪽으로 된 단권이다. 희귀본으로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동의 단양우씨 첨모당(瞻慕堂)에 소장되어 있다.

서두에는 퇴계 이황이 지은 역동서원의 기문(記文)이 있고 말미에는 예안현감 김취의(金就義)의 발문이 있고 그 옆에 “도산서원에서 개간하고 역동서원에 보관한다”라는 묵서가 있다.

보도는 ‘단양우씨족보’라 쓴 다음 사주단변으로 6층의 횡간을 치고 제1대 시조 우현(禹玄)에서 6대 우중대(禹仲大), 다시 줄을 바꾸어 6대에서 11대하는 식으로 조상의 세대별로 부→자의 친손계만 등재하고 부→녀의 외손계는 싣지 않았다.

시조외에는 성인 우자를 생략하고 이름만 기재하고 문과와 관명만 적고 생몰년월일과 처계·묘소는 일체 기재하지 않은 주기가 매우 간략한 간본이다.

이 족보에는 시조의 장자 천규(天珪)→우탁 계열과 차자 천석(天錫) …… 현보(玄寶), 및 인열(仁烈)·희열(希烈)·숭열(崇烈)의 3대파계를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김취의의 발문에 의하면 퇴계 이황이 우탁의 학덕을 존경하는 뜻으로 역동서원을 짓게 하고 우씨의 족보를 손수 써서 서원에 간직했는데 임진왜란 중에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난후 우복룡(禹伏龍)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오자 우성적이 방문하여 그 연유를 보고한 바 있으며 금응훈(琴應壎)과 김기(金圻)가 우성적에게 “퇴계 이선생의 문집 판각이 이미 끝났으니 그 각수와 남은 자재를 갖고 우선생(우탁)의 족보를 간행하지 않겠는가” 하자 그는 동족 우선경(禹善慶)·우치근(禹致勤) 등과 상의하여 쌀과 베를 거두어 발간의 경비를 충당했다는 것이다.

이 족보는 16세기 중반 소수서원 창설과 동시에 그 주향자 안향(安珦)을 중심한 순흥안씨족보가 간행되고 도산서원일 설립된 뒤에 진성이씨족보가 편간되었듯이, 역동서원 설립과 동시에 그 주향자인 우탁의 조상과 그 자손세계를 정리하는 데서 단양우씨족보가 최초로 간행되었다.

뒷날 단양우씨족보가 고부(古阜)와 대구에서 속간되면서 조상의 세계와 후손들의 계파문제를 두고 분쟁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 족보는 비교적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내용이 너무 간략하여 자료적 가치는 희박하다.

참고문헌

『단양우씨족보(丹陽禹氏族譜)』(예안본·고부본·대구본)
『성호집(星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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