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지역을 대표한 학자이자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1588년 39세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인 최영경을 만나서 강론하였다. 1590년 41세에는 도산에 가서 이황의 묘를 참배하였다. 1595년(선조 28) 46세에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었다. 1610년 61세에는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서사원은 손처눌(1553~1634), 곽재겸(1547~1615)과 함께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초기 대구가 왜군에 점령당하자 대구부사 윤현은 팔공산 동화사에 머물며 군사를 모았다. 서사원과 손처눌도 이곳으로 피란하였다가 대략 6월 말부터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서사원 · 손처눌 · 곽재겸은 대구 지역 유학을 이끈 1세대였던 전경창(全慶昌)이나 정사철(鄭師哲)에게 수학하다가 후에 정구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세 사람은 대구 지역 유학을 이끈 2세대였다. 이들 각자도 문인은 두었는데, 서사원의 문인록에는 113명 이상의 문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구가 말년에 성주를 떠나 대구 인근 팔거현 등지로 이거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한편, 서사원 · 손처눌 · 곽재겸은 정치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었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쓴 상소인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에 대해서 많은 선비들이 정인홍을 비판하였지만, 서사원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국역 낙재선생일기』(달성서씨 현감공파 종중, 2008)
- 『선조실록(宣祖實錄)』
논문
- 추제협, 「조선 중기 한강학파의 전개에서 본 대구지역 성리학의 특징」(『국학연구』 36, 한국국학진흥원, 2018)
- 우인수, 「『낙재일기』를 통해본 대구지역 임진왜란 의병의 활동과 성격」(『대구사학』 123, 대구사학회, 2016)
- 추제협, 「서사원의 심학과 의병활동」(『동양철학』 44, 한국동양철학회, 2015)
- 서수생, 「낙재(樂齋) 서사원 선생의 행적과 의병활동」(『동방한문학』 30, 동방한문학회, 200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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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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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회퇴변척소란 회퇴를 변척(배척)하는 상소라는 뜻이다. 회퇴란 이언적의 호인 '회재(晦齋)'와 이황의 호인 '퇴계(退溪)'에서 각각 앞글자를 따서 두 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쓴 상소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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