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 · 낙재(樂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서필(徐弼),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期), 아버지는 전교 서흡(徐洽)이다. 큰아버지 서형(徐泂)에게 입양되었다.
1577년(선조 10) 28세에 비로소 처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나아가 문인이 되었다. 1579년 30세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지었다. 장현광과 상종하며 강론하였다. 1586년 37세에 도성유(都聖俞)를 제자로 삼으면서 비로소 제자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1588년 39세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인 최영경을 만나서 강론하였다. 1590년 41세에는 도산에 가서 이황의 묘를 참배하였다. 1595년(선조 28) 46세에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었다. 1610년 61세에는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서사원은 손처눌(15531634), 곽재겸(15471615)과 함께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초기 대구가 왜군에 점령당하자 대구부사 윤현은 팔공산 동화사에 머물며 군사를 모았다. 서사원과 손처눌도 이곳으로 피란하였다가 대략 6월 말부터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서사원 · 손처눌 · 곽재겸은 대구 지역 유학을 이끈 1세대였던 전경창(全慶昌)이나 정사철(鄭師哲)에게 수학하다가 후에 정구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세 사람은 대구 지역 유학을 이끈 2세대였다. 이들 각자도 문인은 두었는데, 서사원의 문인록에는 113명 이상의 문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구가 말년에 성주를 떠나 대구 인근 팔거현 등지로 이거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한편, 서사원 · 손처눌 · 곽재겸은 정치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었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쓴 상소인 「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에 대해서 많은 선비들이 정인홍을 비판하였지만, 서사원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문집으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한편, 『낙재선생일기』가 근래 계명대학교 도서관 한적 고서 속에서 발견되었다. 1592년 4월 12일부터 선조 28년(1595) 9월 20일까지 3년 4개월 26일간의 일기이다. 대구 의병의 결성 과정부터 활동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대구 지역 의병 활동사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615년 66세에 사망하였다. 대구부 서쪽 30리(약 12㎞) 지점인 파산(巴山)에 묘소가 있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