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에 대구 지역 의병장으로, 전란 후 대구 지역 재건과 연경서원 복설을 주도한 학자.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그러나 1593년(선조 26) 2월과 1594년(선조 27)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군무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1597년(선조 30) 손처눌은 양친의 상을 모두 마치고 다시 군무를 보았다. 그해 9월 일본군이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침입하자, 복병과 기물로 일본군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손처눌과 서사원 등은 1605년(선조 38) 대구 전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통강을 실시하였고, 사당을 건립하여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손처눌은 연경서원의 사당 건립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자, 한강 정구에게 문의하였다. 손처눌의 문의에 따라 정구는 서원의 뒤쪽 언덕에 올라 위치를 선정해 주었다. 1620년(광해군 12)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1622년 3월 연경서원에 정구를 배향하였다. 이때 손처눌은 퇴계에게 고한 고유문(告由文)과 봉안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손처눌은 전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복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모당선생문집(慕堂先生文集)』
단행본
- 구본욱 ,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설립과 위상 및 의의」(『한국서원학보』 25, 한국서원학회, 2020)
- 구본욱 , 「대구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조선사연구』 24, 조선사연구회, 201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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