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1553년(명종 8) 대구부(大丘府) 수성리(壽城里)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15세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다.
1569년(선조 2)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의 딸인 광주이씨와 혼인하였다. 1587년(선조 20) 부인 이씨가 죽자, 이듬해 하성조씨(夏城曺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1570년(선조 3) 18세에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을 모시고 팔공산 파계사(巴溪寺)에서 글을 읽었다. 1571년(선조 4) 19세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처음 만났다. 1572년(선조 5)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해 10월 동생 오매(五梅) 손처약(孫處約)과 함께 팔공산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1573년(선조 6) 향시에 입격하였다. 그는 감찰 김자용(金宇容)과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경학과 심학을 심화시켜 나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처눌은 양친을 모시고 최정산(最頂山)으로 피란하였다. 5월 행재소에서 윤지(綸旨)가 있자, 동생 손처약과 창의할 것을 맹서하였다. 5월 28일 팔공산으로 피난을 온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팔공산 부인사(夫仁寺)에서 회합을 하고 창의를 발의하였다. 6월 손처눌은 임하 정사철, 낙재 서사원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7월 6일에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의병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손처눌은 공산의진군의 수성현 대장을 맡았다. 그는 대구 파잠의 협곡에 복병을 설치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2월과 1594년(선조 27)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군무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1597년(선조 30) 손처눌은 양친의 상을 모두 마치고 다시 군무를 보았다. 그해 9월 일본군이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침입하자, 복병과 기물로 일본군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손처눌과 서사원 등은 1605년(선조 38) 대구 전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통강을 실시하였고, 사당을 건립하여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손처눌은 연경서원의 사당 건립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자, 한강 정구에게 문의하였다. 손처눌의 문의에 따라 정구는 서원의 뒤쪽 언덕에 올라 위치를 선정해 주었다. 1620년(광해군 12)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1622년 3월 연경서원에 정구를 배향하였다. 이때 손처눌은 퇴계에게 고한 고유문(告由文)과 봉안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손처눌은 전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복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술로 『모당선생문집(慕堂先生文集)』이 전한다. 초간본(初刊本)은 1784년에 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중간본(重刊本)은 1849년에 연보 · 행장 · 사우서독(師友書牘) 등을 증보하여 9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1634년(인조 12)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