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미(海美). 고조할아버지는 곽세공(郭世功), 증조할아버지는 예조좌랑을 역임한 곽기수(郭期壽)이다. 할아버지는 곽치요(郭致堯), 아버지는 헌납(獻納)을 지낸 곽성귀(郭聖龜)이다. 동생은 곽제항(郭齊恒)이다. 해미곽씨는 세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곽기수, 곽성귀, 곽제화이다. 장인은 홍명현(洪命顯)이다.
1650년(효종 1)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출사 직후인 1652년(효종 3) 사관을 역임하고, 효종조에서는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현종조에서도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주로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공론(公論)울 주도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을 탄핵하였다. 탄핵을 받은 정유성은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해 곽제화는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사간(司諫) 김우형(金宇亨) 등이 상소를 올려 곽제화의 외직 임명을 철회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우형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이지 않자 인피(引避)하여 현종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도 재차 사직 상소를 올렸다. 결국 경성판관에 제수된 곽제화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였음에도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현종은 곽제화에게 임지로 떠나라는 하교(下敎)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의 탄핵과 곽제화의 경성판관 제수를 둘러싼 현종과 대간들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결국 현종은 대간들이 곽제화의 외직 임명 철수를 요청하는 건의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경성판관 곽제화는 월과(月課)를 세번이나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해당 고을인 경성에 충군(充軍)되었다. 1675년(숙종 1년) 사헌부 헌납으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이후 사간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1790년(정조 14) 전라도 영암군에 문중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부암서원(夫岩書院)으로 건립되었고, 뒤에 곽제화의 영정을 봉안한 부암영당(夫岩影堂)이 세워졌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복설(復設)과 소실이 반복되었다. 2010년 충효사라 개칭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