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逑)는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43년(중종 38)에 태어나 1620년(광해군 12)에 사망했다. 5세에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고 한다. 향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가례집람보주』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다. 국가례(國家禮)와 사가례(私家禮)를 하나의 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주자의 총체적인 예학을 추구하였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 · 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 · 『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 강원도관찰사 ·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 · 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 · 송원기(宋遠器) · 손처눌(孫處訥) · 한준겸(韓浚謙) · 문위(文緯) · 장흥효(張興孝) · 이윤우(李潤雨) · 허목(許穆) · 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 역사 · 산수(算數) · 병진(兵陳) · 의약(醫藥) · 복서(卜筮) · 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 ·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 『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예학은 국가례(國家禮)와 사가례(私家禮)를 하나의 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주자의 총체적인 예학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차별성을 강조해 17세기 예학의 한 경향인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단초를 열었다.
이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체재를 모범으로 하고 사마광(司馬光) · 장재(張載) · 정호(程顥) · 정이(程頤) · 주자 등의 예설을 바탕으로 해 가(家) · 향(鄕) · 방국(邦國) · 왕조례(王朝禮)를 복원한 『오선생예설분류』에 잘 나타나 있다.
읍지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해 『동복지(同福志)』 · 『관동지(關東志)』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영가지(永嘉志)』 · 『평양지(平壤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해 후대의 읍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咸州志)』 하나 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하였다. 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 · 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비판한 이황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聖賢風範)』 ·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
역사서로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뒤에 나타나는 정통론과 강목체 사서와의 매개 역할을 한 『역대기년(歷代紀年)』과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충모(古今忠謨)』 · 『치란제요(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문학서로서는 『고금회수(古今會粹)』 ·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했으며,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醫眼集方)』과 집에 소장한 의학서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속집(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은 이황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 · 조식학파의 박학(博學)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근기남인 실학파의 탈주자학적 사상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서경덕 · 조식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 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