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5년(명종 20) 예안 도산정사(陶山精舍)로 이황(李滉)을 찾아가 『심경(心經)』을 배웠다. 이후에도 관계를 지속해, 1566년에는 김굉필(金宏弼)의 사적 · 시문과 그에 관한 다른 선비들의 글을 모아 이황에게 보냈으며, 이황은 주로 그것들을 바탕으로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하였다.
1555년 별거 초시(別擧初試)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의금부도사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경력 · 전생서 직장 · 주부 · 장례원 사평을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중시 문과에 급제했고, 부사과를 거쳐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했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사과 · 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 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585년 첨지중추부사 · 동부승지 · 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 · 호조참의 ·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587년 여러 해동안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해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녕부사 겸 오위장 ·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 · 대사성 · 한성부 좌윤 등을 거쳐 159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다. 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했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영위사(迎慰使) · 접반사(接伴使)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 · 예조판서,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 · 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일찍이 수령 역임 시 학문 진흥과 사풍(士風) 진작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했다.
죽은 뒤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곡집』 4권 4책이 규장각 도서에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