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장예원에 소속된 정6품 관직.
제도/관직
설치 시기
1466년(세조 12)
폐지 시기
1764년(영조 40)
소속
장예원
내용 요약

사평(司評)은 조선시대, 장예원에 소속된 정6품 관직이다. 1466년(세조 12)에 형조도관이 변정원으로 바뀌면서 형조도관의 좌랑이 변정원 사평으로 바뀌었고, 다음 해 변정원이 장예원으로 바뀌면서 장예원에 속한 관직이 되었다. 노비 관련 송사를 판결하는 결송관인 사평은 1764년(영조 40)에 장예원이 보민사로 바뀌면서 혁파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장예원에 소속된 정6품 관직.
설치 목적

1392년(태조 1)에 설치한 형조도관(刑曹都官)을 1466년(세조 12)에 관제를 정비하면서 주1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이때 형조도관의 정랑사의(司議)로, 좌랑을 사평(司評)으로 바꾸었으며, 정랑 하나를 없애고 사평을 하나 더 두었다. 이후 『 경국대전』의 규정에는 장예원에 정3품의 판결사 1명, 정5품의 사의 3명, 정6품의 사평 4명이 속해 있다.

임무와 직능

사평은 노비문적(奴婢文籍)과 노비 관련 송사를 담당하는 장예원의 정6품 관원으로, 당상관인 판결사와 합좌하여 사의와 함께 노비 관련 송사를 판결하는 결송관이다. 원래 형조도관의 직제는 종3품 지사 1명, 정4품 의랑 2명, 정5품 정랑 2명, 정6품 좌랑 2명, 정7품 주사 2명, 8품의 영사 6명이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에 변정원이 설치되면서 정3품 당상의 판결사 1명, 정5품의 사의 1명, 정6품의 사평 3명을 두었으며, 다음 해 장예원으로 개편되면서 일부 인원 변동이 있었으나 직제는 그대로 계승하여 『경국대전』에는 판결사 1명, 사의 3명, 사평 4명으로 규정되었다.

노비 송사를 판결하는 사평은 법과 업무에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였기 때문에 자주 교체하지 않는 주2직(久任職)이다. 따라서 사평에 임명되면 법정 근무 일수를 마친 뒤에야 직책을 옮길 수 있었다.

변천사항

1764년(영조 40)에 장예원을 혁파하고 보민사(保民司)를 설치하면서 사평도 혁파되었다.

의의 및 평가

조선시대 노비는 귀중한 재산이므로 노비 송사가 중요하였지만, 사평을 문과 출신자들은 선호하지 않았고 주로 문음 출신자가 맡는 직책이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세조실록(世祖實錄)』
『속대전(續大典)』
『영조실록(英祖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논문

김용만, 「조선시대 장예원연구 서설」(『교남사학』 2, 영남대학교 국사학회, 1987)

인터넷 자료

조선왕조실록사전(http://waks.aks.ac.kr/site/encysillok)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노예의 부적과 소송을 맡아보던 관아. 세조 12년(1466)에 형조도관을 고친 것으로, 이듬해 장례원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2

일을 오랫동안 맡김.    우리말샘

집필자
임선빈((前)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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