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예·병·형·공조의 중견실무 책임자들이었다. 정원은 고려시대에는 문종대를 기준으로 각 부마다 2인이 표준이었으나 이부만 1인이었다. 그리고 이부 고공사(考功司)와 형부 도관(都官)에 각각 2인이 더 배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5년(태종 5) 1인씩 증원해 각 조 3인이 표준이었다.
그러나 병조와 형조에는 4인이었고, 후기에는 이조 2인, 호조 3인으로 조정되었다. 정랑은 고려 초기 각 부에 두었던 정5품 낭중(郎中)을 1275년(충렬왕 1) 6부가 4사로 개편되면서 정랑으로 개칭된 것이다. 그 뒤 한때 낭중으로 환원하기도 했으나, 1356년(공민왕 5) 다시 정랑으로 개정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그대로 사용하였다.
육조의 권한이 강화되어 국정의 중심기구가 된 조선시대에는 정랑과 정6품 좌랑이 각 조의 실무를 장악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대표적인 청요직으로 간주되었다. 이조 · 병조 · 예조의 정랑 · 좌랑은 특별히 중시되어 문과 출신의 문관으로만 임명하게 하였다. 이들을 낭관 · 낭청 혹은 조랑(曹郎)이라고도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 · 좌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전랑(銓郎)이라고도 하였다. 특히, 이조 문선사(文選司)와 병조 무선사(武選司)의 전랑은 당상관들의 인사전형회의에 배석해 임용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때 이조전랑은 삼사 관직과 같은 청요직의 임명제청권을 행사하였는데, 이를 통청권(通淸權)이라 하였다.
또한, 이조정랑과 병조정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전랑자대법(銓郎自代法) 혹은 전랑법이라 하였다. 젊은 낭관들에게 주어졌던 이러한 막중한 권한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붕당이 조성되어 동서분당을 가져오는 등 물의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여러 차례 통청권과 전랑법을 제한하였고, 1789년(정조 13)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하였다. 또한, 이조정랑의 통청권은 삼사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게 되어 간접적으로 국가의 언론과 탄핵권을 지배하는 양상을 가져왔다.
그래서 당쟁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이조정랑이 재상을 능가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확립되면서 그 권한이 약화되었고, 1741년(영조 17)에는 통청권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