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이듬해 심양(瀋陽)에 잡혀가 죽은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한 것이다. 규장각도서에 1책의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으나, 그 원문은 ≪송자대전 宋子大全≫ 제213권에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 필사본에는 저술 연도를 1674년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또, 삼학사와 관계없는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보낸 칙유(勅諭), 윤봉구(尹鳳九)가 지은 송시열의 묘지문, 왕세손(후의 정조)의 상소문과 1776년의 친제문(親祭文) 등이 합편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정조 때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며, 필사하는 과정에 다소 착오가 있어 자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 책은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순으로 그들의 약전(略傳)과 언행을 기록하고, 잡혀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기까지 조정의 의논과 대청(對淸) 관계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기록하였다. 또, 본문에는 그들이 올린 척화소(斥和疏)의 중요 부분과 심양에서의 심문 대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 요지는 모두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의 의리를 강조한 것이다. 즉, 천하의 유일하고 진정한 정통은 명조(明朝)에 있으며, 천자를 참칭하는 청나라는 이적(夷狄)의 나라이므로 교류할 수 없기에 강화를 맺거나 항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는 실상 저자 송시열 자신의 신념이었으므로 삼학사의 언행 중에서 특히 강조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절의에 죽은 그들의 가족과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황일호(黃一皓) 등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또, 강화도에서 죽지 않았다 하여 뒤에 저자가 비난한 윤선거(尹宣擧)를 이 책에서는 깨끗하게 지조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 주목된다.
또, 신종의 사당을 세워 효종을 배향하고 그 묘정에 삼학사를 종향하려는 저자의 뜻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효종의 북벌 계획이 있은 뒤 조선에 풍미했던 존주사상(尊周思想)의 동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피전자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명성과 춘추대의(春秋大義) 및 유려한 필치에 힘입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전기 작품이 되었다. ≪삼학사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 六臣傳≫의 사육신에 필적할 만큼, 그 피전자들을 조선 후기 최고의 충신의사로 추앙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