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경기도 고양 출신. 정인필(鄭寅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김정국(金正國)·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중에 이황(李滉)에게 『심경』·『역학계몽』 등을 배웠다.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지극한 효심으로 예를 다하였다. 스승 김정국이 죽은 뒤에도 심상(心喪) 3년을 지냈다. 집이 너무 가난해 끼니를 걸러도 개의치 않았으며, 마음이 바르고 악을 매우 미워하는 성격이었다. 일찍이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어도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구명하고, 그 뒤 1553년(명종 8) 이황의 의견을 따라 다시 정정하였다. 먼저 지은 것을 「천명구도(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정정한 것을 「천명신도(天命新圖)」라 해 현재까지 전해 온다. 우리 나라에서 「천명도설」을 시도한 것은 정지운이 처음인 것으로 본다.
물론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과 같은 도상학(圖象學)이 있기는 하나 「천명도설」은 정지운의 독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천명도」가 있다고 그 선후를 논하기도 하나, 정지운의 「천명도설」의 구도(舊圖)는 독창적이어서 최초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뒤에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제자인 풍덕군수 안홍(安鴻)의 주선으로 천마산(天磨山)에 유람갔다가 병이 들어, 돌아오는 도중에 승평부(昇平府: 지금의 개풍군 풍덕리)의 강구(江口)에서 죽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정식(鄭軾)·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40년(인조 18)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천명도설(天命圖說)』이 있다.